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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禱久]~도구[菟裘]~도구[屠狗]~도구과두[跿跔科頭]~도구참비교[渡溝塹飛橋]


도구[禱久]  공자가 병이 났을 때, 자로(子路)가 천지신명께 기도하기를 청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기도한 지 오래이다.[丘之禱久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공자 자신은 기도를 해야 할 과실을 짓지 않았다는 뜻이다. <論語 述而>

도구[菟裘]  도구(菟裘)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사수현(泗水縣)에 있는 지명인데, 일반적으로 몸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나 사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춘추 시대 노나라의 신하인 우보(羽父)가 그 임금 은공(隱公)에게 아우 환공(桓公)을 죽이자고 청하였을 때, 은공이 거절하고 차라리 임금의 자리를 떠나 도구로 가서 살려고 하였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隱公 11年>

도구[菟裘]  도구(菟裘)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읍(邑)으로 태산(泰山) 양보현(梁父縣) 남쪽에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11년 조에 “도구에 궁실을 짓게 하여 내가 장차 그곳에 가서 늙으리라.[使營菟裘 吾將老焉]”라고 한 은공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이후로는 은거(隱居)의 의미로 쓰였다.

도구[屠狗]  개백정. 옛날에 연(燕) 나라 지방에는 기절이 있는 협객(俠客)이 많았는데, 그들이 때를 만나지 못할 때에는 개 잡는 천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다. 전국 시대 말기의 유명한 자객(刺客)인 형가(荊軻)가 연나라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진왕(秦王)인 영정(嬴政)을 죽이러 갔다가 피살당했는데, 사기(史記) 권86 자객열전(刺客列傳)에 “형가(荊軻)는 연(燕)나라로 옮긴 후부터 연나라의 개백정과 축(筑)의 명수인 고점리(高漸離)와 가까이 지냈다. 형가는 술을 즐겨 날마다 개백정과 고점리와 함께 연나라 장터에 나가 술을 마셨다. 술이 취하면 고점리가 축을 울리고 형가가 거기 맞추어 노래를 불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가 하면, 나중엔 함께 울며 옆에 사람이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형가는 술꾼들과 섞이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은 침착하고 독서를 좋아했다.[荊軻旣至燕, 愛燕之狗屠及善擊筑者高漸離. 荊軻嗜酒, 日與狗屠及高漸離飮於燕市, 酒酣以往, 高漸離擊筑, 荊軻和而歌於市中, 相樂也, 已而相泣, 傍若無人者. 荊軻雖遊於酒人乎, 然其爲人沈深好書.]”라고 하였다.

도구[陶句]  진(晉) 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의 시구를 가리킨다.

도구과두 관이분극[跿跔科頭 貫頤奮戟]  도구(跿跔)는 장애 등을 뛰어 넘는 일을 이르고, 과두(科頭)는 투구를 쓰지 않은 맨 머리를 이른다. 전국책(戰國策) 한책(韓策)에 “진(秦)나라는 대갑(帶甲) 1백만에 병거는 1천 승(乘)이요, 기마(騎馬)는 1만 필이나 되며 용맹한 병사와, 장애물(障礙物)을 뛰어넘는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은 군사, 만궁(彎弓)으로 화살을 쏘는 군사, 창검으로 분극(奮戟)하는 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秦帶甲百餘萬, 車千乘, 騎萬匹, 虎摯之士, 跿跔科頭, 貫頤奮戟者, 至不可勝計也.]”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도구성[陶九成]  도종의(陶宗儀)이다. 자는 구성(九成), 호는 남촌(南村), 황암인(黃岩人)이다. 과거에 떨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힘써 박학(博學)으로 이름났으며, 생도들을 교수하며 지내다 1400년대 초기에 졸하였다. 설부(說郛), 철경록(輟耕錄), 서사회요(書史會要) 등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전고(典故)의 수집에 뛰어났다.

도구자[屠狗者]  형가(荊軻)와 고점리(高漸離) 등을 이른다.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의하면 형가(荊軻)는 술을 즐겨 날마다 도구(屠狗: 개백정) 및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려 연(燕)나라 저잣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고점리는 축(筑)을 치고 형가는 노래를 부르며 서로 즐기다가 이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한다.

도구참비교[渡溝塹飛橋]  도랑과 참호를 건너갈 때 사용하는 부교(浮橋)의 일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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