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국[圖局] 무덤이 있는 산세의 포옹(抱擁)한 지국(地局)을 말한다.
도국공[道國公] 주돈이(周敦頤)를 가리킨다. 북송(北宋)의 학자이다. 자는 무숙(茂叔), 호는 렴계(濂溪), 시호는 원공(元公)이며, 호남성(湖南省) 영주(永州) 출신이다. 정향(程珦)의 추천을 받아 분영현(分寧縣)의 주부를 거쳐 남안(南安)의 사리참군(司理參軍)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정향(程珦)의 두 아들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가르쳤다. 합주판관(合州判官), 건주통판(虔州通判), 광동전운판관(廣東轉運判官), 지남강군(知南康軍)을 역임하였다. 진박(陳搏)의 무극도(無極圖)를 참고하여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만들었는데, 이는 송대 성리학의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 외에 대표적인 저서로 통서(通書)가 있다. 송(宋)나라 이종(理宗) 때 여남백(汝南伯)에 봉해지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원(元)나라 인종(仁宗) 때 도국공(道國公)에 추봉되었다.
도국근성[島國根性] 섬나라 사람의 옹졸한 성질. 배타적이고 단결성·독립성이 강함.
도국포매[陶菊逋梅] 도잠(陶潛)의 국화와 임포(林逋)의 매화로, 도잠이 국화를 좋아하고 임포가 매화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도군[道君] 남송(南宋) 휘종(徽宗) 조길(趙佶)이다. 도교(道敎)를 매우 숭상하여 도군황제(道君皇帝)라 자칭하였다. 휘종의 생전에 전위(傳位)를 받은 흠종(欽宗)이 휘종에게 교주도군황제(敎主道君皇帝)란 존호(尊號)를 올리었다. 금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가 후에 오국성(五國城: 지금의 흑룡강 의난依蘭)에서 사망하였다. 그림을 잘 그렸다.
도군[都君] 순(舜)을 이른다. 순이 사는 곳은 어디나 순의 덕을 사모하여 모여든 백성들로 삼년(三年)이면 도시(都市)를 이루었으므로 이렇게 일컬었다 한다. <孟子 萬章上>
도군[陶君] 도홍(陶泓) 즉 벼루를 가리킨다. 한유(韓愈)가 사기(史記)의 필법을 모방하여 붓을 소재로 모영전(毛穎傳)을 지으면서, 붓과 먹과 벼루와 종이 등 이른바 문방사우(文房四友)에 대해서, 각각 관성자(管城子), 진현(陳玄), 도홍(陶泓), 저선생(楮先生)으로 의인화(擬人化)하였다.
도군[陶君] 동진의 처사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군은 곧 그를 징군(徵君)이라 칭하는 데서 온 말인데, 징군은 조정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학덕 높은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도군무현금[陶君無絃琴] 도군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송서(宋書) 권93 도잠열전(陶潛列傳)에 “도연명은 음률(音律)을 모르면서 소금(素琴) 하나를 집안에 두었는데, 줄이 없어 술기운이 얼큰하면 손으로 어루만져 뜻만 부쳤다.[潛不解音聲, 而畜素琴一張, 無弦, 每有酒適, 輒撫弄以, 寄其意.]”라고 하였다. 또, 이백(李白)의 시 증임명현령호제(贈臨洺縣令皓弟)에 “도잠은 팽택 영을 그만두고 떠나, 아득히 태곳적 마음을 지녀서, 오묘한 소리가 절로 곡조를 이뤘기에, 단지 줄 없는 거문고만 탔었다네.[陶令去彭澤 茫然太古心 大音自成曲 但奏無絃琴]”라고 하였다.
도군지주[陶君止酒] 진(晉)의 도잠(陶潛)이 음주(飮酒)라는 제목으로 시(詩) 20수를 쓰고, 그 다음에 지주(止酒)라는 제목으로 술을 끊어야겠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陶淵明集 卷三>
도군황제[道君皇帝] 송(宋)나라 휘종(徽宗)이다. 도군(道君)은 본래 도교(道敎)의 학설에서 나온 것으로 삼청구궁(三淸九宮)의 요속(僚屬) 중에서 지위가 존귀한 자를 일컫는 말인데, 송나라 휘종이 도교를 좋아하여 자신을 도군황제(道君皇帝)라 일컬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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