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闍崛] 기도굴산(耆闍崛山)인데, 영취산(靈鷲山), 영오산(靈烏山), 영오정산(靈烏頂山)이라고도 한다. 중인도(中印度) 마게타국(摩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동북쪽에 있는데, 석가가 설법한 곳이다. 수경주(水經注)에 “기도굴산은 아욕달(阿縟達)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는데, 서쪽에서 그 산을 바라보면 2개의 산봉우리가 2, 3리 거리로 나란히 서 있고 중간의 길에 수리가 항상 산마루에 있기 때문에 토인이 기도굴산이라고 부른다. 호인(胡人)의 말로 기도는 수리이다.”라고 하였다.
도굴계맹[道屈季孟] 도가 계씨와 맹씨에게 버림받음. 춘추(春秋) 시대 노(魯)나라의 삼경(三卿)인 계손씨(季孫氏)·숙손씨(叔孫氏)·맹손씨(孟孫氏) 중에 계손씨가 가장 강신(强臣)이었으므로, 제 경공(齊景公)이 일찍이 공자를 대우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계씨와 같이는 내가 해 주지 못하겠고, 계씨와 맹씨의 중간 정도로나 대우하겠다.[若季氏則吾不能, 以季孟之間待之.]”라고 하였는데, 계씨는 상경(上卿), 맹씨는 하경(下卿)이니, 두 벼슬의 중간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또, 제 경공이 또 말하기를 “내가 이미 늙었는지라, 등용하지는 못하겠다.”라고 하였고, 공자는 그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마침내 떠나 버렸다. <論語 微子>
도궁[都宮] 여러 사당이 모여 있는 궁궐을 칭한 것으로, 옛날에는 여기에 여러 개의 사당을 따로따로 모셨으나 후세에는 한 사당에 여러 위패(位牌)를 함께 모셨다.
도궁[都宮] 작은 담장으로 구획된 건축 공간을 궁(宮)이라 하는데, 한 장소에 여러 개의 구획된 건축 공간을 두고, 이를 다시 큰 담장으로 함께 에워싼 것을 도궁(都宮)이라 한다.
도궁[途窮] 의탁할 곳이나 갈만한 곳이 없는 궁색한 처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 나라 완적(阮籍)이 나가서 노닐다가 길이 막힌 곳에 이르면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晉書 阮籍傳>
도궁곡[途窮哭] 궁도지곡(窮途之哭). 즉 ‘길이 끝나는 데서 통곡하다’라는 뜻으로 몸이 곤경에 처하여 슬퍼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에 “때때로 맘이 동하면 홀로 수레를 몰고 나가 정해진 길도 없이 가다가 길이 막히는 곳에서 문득 큰 소리로 울다가 돌아왔다.[時率意獨駕, 不由徑路, 車跡所窮, 輒慟哭而反]”고 하였다.
도궁비현[圖窮匕見] 지도를 다 펼치자 비수가 드러남. 모략이 탄로 남. 마지막 단계에서 진상이나 본성이 드러남. 전국시대 연(燕)나라는 진(秦)나라의 침범을 자주 받곤 했는데, 연(燕)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진나라에 잡혀간 일조차 있었다. 태자 단은 본국으로 돌아온 뒤 늘 복수를 다짐했는데, 자객 형가(荆轲)로 하여금 비수를 지도에 말아 감추어 가 진왕 정(秦王政: 뒷날 진시황秦始皇)을 찌르도록 하였으나 실패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에 “형가는 번오기의 머리가 든 함을 받들고, 진무양은 지도가 든 함을 받들었다. 지도 안에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차례로 진왕 앞에 나아가는데, 계단에 이르자 진무양이 안색이 변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여러 신하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겼다. 형가는 진무양을 돌아보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가 ‘미천한 북방 오랑캐가 아직 천자를 배알한 일이 없으므로 겁이 나서 몸을 떠는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이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고 사자의 예를 끝마치도록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진왕이 형가에게 ‘무양이 가진 지도를 꺼내 보이라.’고 말하였다. 형가가 지도를 꺼내어 왕에게 바쳤다. 왕이 지도를 다 펼칠 즈음에 속에 든 비수가 나타났다.[荊軻奉樊於期頭函, 而秦舞陽奉地圖柙. 以次進, 至陛, 秦舞陽色變振恐. 群臣怪之. 荊軻顧笑舞陽, 前謝曰, 北蕃蠻夷之鄙人, 未嘗見天子, 故振慴. 願大王少假借之, 使得畢使於前. 秦王謂軻曰, 取舞陽所持地圖. 軻旣取圖奏之, 秦王發圖, 圖窮而匕首見.]”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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