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남[圖南] 남쪽으로 가기를 도모함. 어느 다른 지역으로 가서 큰 사업(事業)을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큰 사업이나 웅대한 일을 계획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도남[圖南] 도남붕익(圖南鵬翼). 붕새가 남쪽 바다로 가기를 도모한다는 것인데, 장자(莊子)의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붕새가 남쪽 바다[南冥]로 옮겨 갈 때에는 물결을 치는 것이 삼천 리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여섯 달을 가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영걸(英傑)의 웅대한 포부를 의미한다.
도남[圖南] 도남(圖南)은 송(宋) 나라 은사 진단(陳摶)의 자이다. 사호(賜號)는 희이선생(希夷先生)이다. 수십년 동안 곡물은 먹지 않고 하루에 두세 잔의 술만 마시며 소화산(少華山)의 석실(石室)에서 지냈다고 하며, 한번 침처(寢處)에 들면 백여 일씩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에 지현편(指玄篇), 삼봉우언(三峯寓言) 등이 있다. <宋史 卷457 陳摶傳>
도남대택[道南大宅] 주유(周瑜)가 손책(孫策)과 우의가 깊어서 자신 소유의 길 남쪽의 큰 집을 손책에게 준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매우 친분이 두터운 사람의 집을 뜻한다. 삼국지(三國志) 권54 오서(吳書) 주유전(周瑜傳)에 “주유는 신체가 건장하고 용모가 준수하였다. 손견이 동탁을 토벌하러 흥의군을 일으켰을 때 서현으로 집을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동갑으로 유독 둘이 친하게 지냈는데 주유가 손책이 살게 길 남쪽에 있는 큰 집을 준 다음에 집에 가서 손책의 모친을 만나 인사를 드렸는데 서로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瑜長壯有姿貌. 初孫堅興義兵討董卓, 徙家於舒. 堅子策與瑜同年, 獨相友善, 瑜推道南大宅以舍策, 升堂拜母, 有無通共.]”라고 하였다.
도남붕익[圖南鵬翼] 남쪽으로 가려는 붕새의 날갯짓.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그 이름이 붕새인데, 등은 태산 같고,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를 올라가 구름을 벗어나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다음에야 남쪽으로 간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갈 적에 작은 메추라기가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 새는 장차 어디를 가려는 걸까? 나는 뛰어올라 봤자 고작 두어 장도 못 오르고 도로 내려와 쑥대밭 사이에서 빙빙 돌 뿐이지만, 이것도 최고로 나는 것인데, 저 새는 장차 어디를 가려는 걸까?’라고 하였다.[其名爲鵬, 背若泰山, 翼若垂天之雲, 搏扶搖羊角而上者九萬里, 絶雲氣, 負靑天, 然後圖南. 且適南冥也, 斥鷃笑之曰 : “彼且奚適也? 我騰躍而上, 不過數仞而下, 翶翔蓬蒿之間, 此亦飛之至也, 而彼且奚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전하여 영걸(英傑)의 웅대한 포부를 의미한다.
도남서원[道南書院] 경상북도 상주(尙州) 도남동(道南洞)에 있는 서원으로, 1606년(선조39) 정경세(鄭經世) 등이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이후 노수신(盧守愼), 유성룡(柳成龍), 정경세가 추가로 배향되었고, 1677년(숙종3)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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