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도변[道同道變] 다스려지는 세상을 이은 자는 그 도(道)가 똑같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은 자는 그 도(道)가 변한다는 뜻으로, 난세를 뒤이은 경우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됨을 이른다. 동중서(董仲舒)의 대현량책(對賢良䇿)에 “지금 한(漢)나라는 크게 혼란한 뒤를 이었으니, 마땅히 주(周)나라의 문식(文飾)을 다소 덜고 하(夏)나라의 충(忠)을 취하여 사용해야 한다.[今漢繼大亂之後, 若宜少損周之文致, 用夏之忠者.]”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 동중서는 “치세(治世)에는 도(道)가 일정하나 난세(亂世)에는 도가 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繼治世者, 其道同. 繼亂世者, 其道變.]”라는 설명을 붙였다. <前漢書 卷56 董仲舒傳>
도동무이[道東武夷] 도동(道東)은 오도동(吾道東)의 준말로, 후한(後漢)의 대유(大儒)인 마융(馬融)이 자신의 제자인 정현(鄭玄)을 돌려보내면서 “우리의 도가 이제 동쪽으로 옮겨 가게 되었구나.[吾道東矣]”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무이(武夷)는 주희(朱熹)가 문인들과 강학했던 민중(閩中) 즉 복건(福建) 무이산(武夷山)의 무이정사(武夷精舍)를 가리킨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1605년(선조3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7년(선조40)에 ‘도동(道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78년(숙종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도동해이사[蹈東海而死]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겠다는 뜻으로, 포악한 강대국을 섬기지 않고 차라리 죽겠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노중련(魯仲連)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로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 왕이 만약 아무 방해 없이 제왕이 되어 잘못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는 게 낫지, 차마 그의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도동해중련[蹈東海仲連]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이 조(趙)나라에 있을 때에 진(秦)나라가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위(魏)나라에서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조(趙)나라로 보내 조왕(趙王)을 설득해서 함께 진(秦)나라를 높여 황제로 삼아 진(秦)나라의 군대를 퇴각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중련은 신원연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방자하게 황제가 되어 주제넘게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나는 東海에 뛰어들어 죽음이 있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不願爲之民也]”라고 하여 이 계획이 무산되었다. <史記 권83 魯仲連列傳>
도동해[蹈東海] 동해(東海)에 빠져죽고자 한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魯仲連)이 한 말이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진(秦)나라 장군 왕흘(王齕)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여러 제후들이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조나라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위왕은 신원연(新垣衍)이란 변사를 조나라에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고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중련은 “포악한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차라리 동해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며, 여러 제후들을 연합할 수 있는 계책을 제시하여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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