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령무[陶令畝] 도령(陶令)은 동진(東晉)의 처사(處士)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차조는 본디 술을 빚기에 아주 좋은 곡식이므로, 도잠이 팽택 영으로 있을 때, 현(縣)의 공전(公田)에 몽땅 차조만 심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를 항상 술에 취하게만 하면 만족하겠다.[令吾常醉於酒足矣]”라고 했는데, 그의 처자(妻子)가 메벼[秔] 심기를 굳이 청하자, 그제야 1경(頃) 50묘(畝)에는 술 빚을 차조를 심고, 또 50묘에는 메벼를 심게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陶潛>
도령문[陶令門] 도령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진(晉)나라의 은사(隱士)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이 사는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가 서 있었으므로 흔히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도 칭한다.
도령문전오[陶令門前五] 도잠(陶潛)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으므로 그를 도령(陶令)이라 별칭하였다. 그가 문 앞에 다섯 그루 버들을 심어 놓고 자칭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하였다.
도령병[陶令病] 도령은 도잠(陶潛)이요, 병은 곧 각기병을 가리킨다. 도잠을 매우 존경하던 주자사(州刺史) 왕홍(王弘)이 함께 놀다가 돌아갈 적에 탈 것을 묻자, 도잠은 “나는 본래 다리병이 있어서 그 동안 남여(藍輿)를 탔으니 또한 스스로 돌아갈 수 있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晉書 陶潛傳>
도령부[陶令賦] 도잠(陶潛)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가리킨다.
도령삼경[陶令三徑] 도령(陶令)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진(晉) 나라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장후(蔣詡)가 뜰에 오솔길 세 개를 내고 송(松), 국(菊), 죽(竹)을 심은 고사가 있는데,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동복들은 기꺼이 맞아 주고, 어린 아이는 문에서 기다리네.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남아 있도다. 어린애 손 잡고 방으로 들어가니, 항아리에 술이 가득하구나.[僮僕歡迎 稚子候門 三徑就荒 松菊猶存 携幼入室 有酒盈樽]”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에 삼경(三徑)을 꾸밀 밑천을 마련하려고 팽택 영이 되었던 곡절이 소개되어 있다.
도령여사[陶令廬社]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인 혜원(惠遠)과 교유했던 것을 말한다. 혜원이 객을 전송할 때에 사찰 밖의 호계(虎溪)를 건너는 일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적에는 마음이 서로 계합(契合)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도령일일취 부지오류춘[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도령(陶令)은 진(晉)나라의 처사(處士)인 도연명(陶淵明)이 팽택령(彭澤令)을 지냈다 하여 이렇게 칭한 것이며, 도연명(陶淵明)은 일찍이 문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유선생(五柳先生)이라 호하였다. 이백(李白)의 시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에 “도령은 날마다 취하여, 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것도 몰랐네. 소박한 거문고는 본래 줄이 없었고, 술을 거르는 덴 갈건을 사용했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일컬었지. 그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 볼거나.[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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