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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변고리[道邊苦李]~도병[倒柄]~도보[圖報]~도보불가[徒步不可]


도변고리[道邊苦李]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왕융(王戎)이 어렸을 적에 길가의 오얏나무를 보고는 따 먹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필시 맛이 쓸 것이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도변고리는 용렬한 인간, 혹은 무용지물의 뜻으로 곧잘 쓰이게 되었다. <世說新語 雅量> 도방고리(道傍苦李).

도변고리[道邊苦李]  진(晉)나라 왕융(王戎)이 어렸을 때 한번은 여러 아이들과 길가에서 장난을 하고 놀다가, 마침 오얏나무에 열매가 많이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다른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서로 다투어 달려가는데 왕융은 꼼짝하지 않고 있으므로,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왕융이 “오얏나무가 길가에 있는데 열매가 많이 달려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쓴 오얏일 것이다.[樹在道邊而多子 必苦李也]”라고 하므로, 그것을 따서 맛보니 참으로 그러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晉書 卷43 王戎列傳>

도병[倒柄]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주고서 도리어 그의 해를 받는 것을 이른다. 한서(漢書) 매복전(梅福傳)에 “태아검을 거꾸로 쥐고 그 자루를 초(楚)에게 준 셈이다.[倒持太阿 授楚其柄]”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임금이 신하에게 권병(權柄)을 빼앗긴 것을 태아검을 거꾸로 쥐고 자루를 남에게 주는 것에 비유하여 태아도지(太阿倒持), 도지태아(倒持太阿)라고 한다.

도보[都保]  각 도(都)의 보정(保正)이다. 도(都)는 이(里)다. 보정(保正)은 보의 우두머리이다. 10가(家)를 1보(保)로 하고 그중에 1인을 뽑아 보장(保長)으로 삼고, 50가를 1대보(大保)로 하고 1인을 뽑아 대보장(大保長)으로 삼고, 10대보를 1도보(都保)로 하고, 여러 사람이 복종하는 사람을 도보정(都保正)으로 삼았다. <文獻通考 兵考 兵制>

도보[圖報]  보답할 것을 도모하다.

도보[稻譜]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벼의 다양한 품종과 그 특징을 기록하여 만든 농서(農書)이다. 현재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도보[道甫]  이광사(李匡師)의 자이다. 이광사는 영조 시절 손꼽히던 서예가로서 자기 호(號)를 딴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書體)를 남겼다. <東國文獻 筆苑編>

도보간험[徒步艱險]  걸어 다니며 온갖 고생을 함. 두보(杜甫)는 본디 말[馬]이 없어 항상 도보(徒步)로 다니곤 했던 데서 온 말이다. 그의 시 도보귀행(徒步歸行)에 “푸른 도포의 조사로 가장 곤궁한 사람, 백발의 습유는 도보로 돌아간다네.[靑袍朝士最困者 白頭拾遺徒步歸]”라고 하였다. 그 밖에 심지어 피란(避亂)할 때 온 가족을 거느리고 도보로 다닌 때도 있었다.

도보불가[徒步不可]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안연(顔淵)이 죽었을 때 안연의 아버지인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서 외관(外棺)인 곽(槨)을 만들 것을 청하자 공자가 거절하면서 ‘내가 수레를 팔아 도보로 다님으로써 곽을 만들어 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기 때문에 도보로 다닐 수 없어서이다.’라고 하였다.[顏淵死, 顏路請子之車以為之槨.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 以為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라고 하였다. 대부의 뒤를 따른다.[從大夫之後]는 것은 대부의 신분에 있음을 겸사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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