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국거구류연[道逢麴車口流涎] 두보(杜甫)의 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여양왕(汝陽王) 이진(李璡)은 서말 술을 마시고야 조정에 나갔고, 길에서 누룩 실은 수레만 보아도 입에서 침을 흘렸으며, 주천군에 옮겨 봉해지지 못함을 한한다네.[汝陽三斗始朝天 道逢麯車口流涎 恨不移封向酒泉]”라는 구절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2>
도봉산[道峯山] 서울 북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주벽(主壁)으로 모신 도봉사(道峯祠), 곧 도봉서원(道峯書院)이 있었다.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 도봉산 입구에 있는 서원으로, 1573년(선조6)에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
도봉서원[道峯書院] 서울에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1574년(선조7)에 조광조(趙光祖)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건과 동시에 사액(賜額)되었다.
도봉양호호여언[道逢陽虎呼與言] 소식(蘇軾)의 시 희자유(戱子由)에 “길에서 양호를 만나면 그를 불러 이야기 하니, 속으로는 그른 줄 알면서 입으로는 맞장구치네. 지위만 높고 뜻이 낮으면 무슨 보탬이 되랴, 의기와 절개가 쪼그라들어 이제 얼마 안 남았네.[道逢陽虎呼與言, 心知其非口諾唯. 居高志下眞何益, 氣節消縮今無幾.]”라고 하였다. 양호(陽虎 논어論語에는 양화陽貨)는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 노(魯)의 가신(家臣)으로 주군(主君)인 계씨(季氏)를 무시하고, 한때 노(魯)의 정권을 횡령하였다. 공자(孔子)는 양호(陽虎) 편에서 먼저 부르면 할 수 없이 그와 응대하였다.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양화가 공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만나지 않자 양화가 공자에게 삶은 돼지고지를 선물로 보내주니, 공자가 그 없는 틈을 타서 사례하러 가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셨다.[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而往拜之 遇諸塗]”라고 하였다.
도봉조[逃蓬藋] 오두막으로 도피함. 봉조(蓬藋)는 쑥과 명아주로 지은 초라한 집을 말한다.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 “경사진 지름길에 들어가 오두막의 거친 사립문을 닫도다.[入欹斜之小路, 掩蓬藋之荒扉.]”라고 하였고,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시 차운문잠휴목불출(次韻文潛休沐不出)에 “오직 장중울이 있어, 문 앞에 쑥대와 잡초가 우거졌도다.[惟有張仲蔚, 門前蓬藋深.]”라고 하였다. 또,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가 위 무후(魏武侯)에게 유세(遊說)를 하고 나오자 여상(女商)이 어떻게 했기에 무후가 이를 드러내고 웃기까지 하였느냐고 묻자, 서무귀가 답하기를 “텅 빈 골짜기에 숨어 사는 사람은 명아주와 콩잎이 족제비의 길마저 막고 있는 터라, 빈 골짜기에서 홀로 걷다가 쉬다가 하노라면, 다른 사람의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뻐하는 것인데, 하물며 형제와 친척들의 기침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면 어떻겠는가.[夫逃虚空者, 藜藋柱乎鼪鼬之逕, 踉位其空, 聞人足音跫然而喜矣. 而况乎昆弟親戚之謦欬其側者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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