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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불가문[道不可聞], 도불가옹[道不可壅], 도불가치[道不可致], 도불리필불섬[刀不利筆不銛]


도불가문 문불약색[道不可聞 聞不若塞]  도(道)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함. 분명하게 보이는 명견(明見)이 도와 어긋나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리는 것도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도는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22편 지북유(知北遊)에 “저 도(道)에 도달하려는 지인(至人)은 말을 하지 않으니 말하면 도(道)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道)가 분명하게 보이는 자는 도(道)를 만나지 못할 것이니 말 잘하는 것이 침묵만 못하다. 도(道)는 들을 수 없으니 듣는 것이 귀를 막느니만 못하니 이것을 대득(大得)이라 한다.[彼至則不論, 論則不至. 明見無値, 辯不若黙. 道不可聞, 聞不若塞, 此之謂大得.]”라고 하였다.

도불가옹[道不可壅]  도를 막아서는 안 됨. 장자(莊子) 제14편 천운(天運)에 “본성은 바꾸어서는 아니 되고, 운명을 변화시켜서는 안 되며, 때를 지체시켜서는 안 되며, 도를 막아서는 안 된다. 만약 도를 터득하면 무엇을 말미암든 안 될 것이 없겠지만 도를 잃어버리면 말미암아 될 것이 없을 것이다.[性不可易, 命不可變, 時不可止, 道不可壅. 苟得其道, 無自而不可 ; 失焉者, 無自而可.]”라고 하였다.

도불가치[道不可致]  도(道)는 이르게 할 수 없음. 도는 인지(人知)로 궁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장자(莊子) 제22편 지북유(知北遊)에 “도(道)는 이르게 할 수 없고 덕(德)은 이를 수 없는 것이지만 인(仁)은 해볼 수 있는 것이며 의(義)는 훼손할 수 있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거짓을 꾸미는 것이다.[道不可致, 德不可至. 仁可爲也, 義可虧也, 禮相僞也.]”라고 하였다. 인(仁), 의(義), 예(禮)는 도(道)와 덕(德)에 비해 인위적인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도불고[荼不苦]  씀바귀가 쓰지 않음. 정사에 부지런하여 어떤 고생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시경(詩經) 곡풍(谷風)에 “누가 씀바귀를 쓰다 했는가. 달기가 냉이 같도다.[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이 시는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조강지처(糟糠之妻)가 그래도 남편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하며 추억하는 내용이다.

도불리필불섬 이독가제지[刀不利筆不銛 而獨加諸砥]  칼이 예리하지 않으면 숫돌에 갈고 붓이 뾰족하지 않으면 칼로 다듬듯이, 사람들이 법을 따르지 않아서 기강이 해이해지면 무딘 칼을 숫돌에 갈듯 사람도 엄한 형벌과 가혹한 법으로 다스리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양자법언(揚子法言) 문도(問道)에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학술[刑名術]은 불인(不仁)함이 지극하다. 어찌 백성을 소와 양을 잡듯이 칼과 도마로 제재하는가. 만약 소와 양을 죽이듯이 사람을 형벌로 제어한다면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둔 것이 땅강아지와 지렁이가 8월을 넘기지 못하고 여우와 살쾡이가 섣달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을 것이다. 어떤 이가 ‘칼이 예리하지 않고 붓이 뾰족하지 않으면 숫돌에 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양자(揚子)가 이르기를 ‘무딘 칼을 숫돌에 갈아 예리하게 하듯이 백성을 엄한 형벌로 다스리는 것을 진(秦)나라가 숭상하였다.’라고 하였다.[申韓之術, 不仁之至矣, 若何牛羊之用人也? 若牛羊用人, 則狐貍螻蚓不膢臘也與? 或曰: ‘刀不利, 筆不銛, 而獨加諸砥, 不亦可乎?’ 曰: ‘人砥, 則秦尚矣!’]”라고 한 데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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