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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圖史], 도사[圖斜], 도사[陶舍], 도사[陶謝]


도사[圖史]  도(圖)는 도화(圖畫), 사(史)는 앞 시대의 역사를 말한다. 한서(漢書)에, 언젠가 한 성제(漢成帝)가 후정(後庭)에서 노닐 적에 반첩여(班婕妤)를 황제의 수레에 함께 태우려고 하자, 첩여가 사양하면서 “옛날의 도화를 보건대, 훌륭한 임금은 모두 명신을 옆에 둔 반면에 삼대의 못된 임금은 총애하는 여자를 옆에 두었습니다. 지금 함께 수레에 태우려 한다면 이것과 근사하지 않겠습니까.[觀古圖畫, 賢聖之君皆有名臣在側, 三代末主乃有嬖女, 今欲同輦, 得無近似之乎.]”라고 하니, 성제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만두었다는 반첩사련(班妾辭輦)의 고사가 전한다. 일설에는 도사(圖史)가 경사(經史)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常變通攷 卷29 家禮考疑上 通禮 司馬氏居家雜儀>

도사[圖史]  도서(圖書)와 사서(史書)이다. 소학집주(小學集註) 입교(入敎)에 “여자는 일곱 살에 효경(孝經)·논어(論語)·열녀전(列女傳) 따위를 외워 대의(大義)를 대강 깨달아야 하니, 옛날의 어진 여자는 도서와 사서를 보고 스스로 거울로 삼지 않음이 없었다.[七歲, 誦孝經論語列女傳之類, 略曉大意, 蓋古之賢女無不觀圖史, 以自鑑戒.]”라고 하였다.

도사[圖斜]  양자(養子)로 세우려고 문서를 위조하여 예조(禮曹)의 허가서인 빗기를 받아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용례가 많지 않으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순조19년 7월14일 조에 성명이 같은 자를 양자로 세우기 위해 문적(文跡)을 위조하고, 예조에 올려 빗기를 받아낸 자에 대해 도사율(圖斜律)을 적용한 사례가 있다. 처벌의 수준은 대명률(大明律)의 사위(詐僞)를 적용하여 곤장 1백 대에 3년 유배에 처하였다.

도사[陶舍]  도사(陶舍)는 도연명의 집을 이른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이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을 지었다. <晉書 卷 94 陶潛傳>

도사[陶謝]  도사(陶謝)는 일반적으로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키나, 사(謝)를 남조 제(齊)나라의 사조(謝眺)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 사조는 영명체(永明體)라 불리는 오언체에 능하였고 청신(淸新)한 기풍이 많았다. 이백(李白)이 사조의 시풍을 전수받았다고 하며, 조선 시대에도 사조의 시를 많이 읊조렸다. 도연명은 동진(東晉) 말의 시인으로 전원시(田園詩)에 뛰어났으며, 사영운은 남조 송(宋)나라 때의 시인으로 산수시(山水詩)에 뛰어났다.

도사[陶謝]  진(晉)나라 도잠(陶潛: 도연명陶淵明)과 남조(南朝) 송(宋)의 사령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도잠은 전원시(田園詩)에 능했고, 사령운은 산수시(山水詩)에 능하여, 두 사람 모두 자연의 경물(景物)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난 것을 보고 지은 시(詩)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영운 같은 솜씨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라고 하였고, 허생(許生)의 시(詩)를 높이 찬양하여 지은 시 야청허십일송시애이유작(夜聽許十一誦詩愛而有作)에서도 “도연명과 사령운의 시도 그대에게는 못 미치니, 그대의 시는 시경(詩經)과 초사(楚辭)만큼 추앙 받을 만합니다.[陶謝不枝梧 風騷共推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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