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거[陶隱居] 남북조(南北朝) 시대 양(梁) 나라 사람 도홍경(陶弘景)으로 은거(隱居)는 그의 호이다. 자는 통명(通明), 호는 화양은거(華陽隱居), 또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시호는 정백 선생(貞白先生). 젊었을 때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의 뜻을 품음.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다.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였음. 또 음양(陰陽)·오행(五行)·지리(地理)·의술(醫術)·본초(本草)에 정통하였다. 주요 저서로 진고(眞誥), 등진은결(登眞隱訣),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 등이 있다.
도은거태청방[陶隱居太淸方] 양서(梁書) 도홍경전(陶弘景傳)에 “자(字)는 통명(通明)이고 단양(丹陽) 말릉(秣陵) 사람이다. 구용(句容)의 구곡산(句曲山)에서 멈추더니, ‘이 산 아래가 제팔동천(第八洞天)이므로 금단화양(金壇華陽)의 하늘이라고 명명한다.’라 하였다. 그리고는 가운데 산에 건물을 세우고 자호(自號)를 화양은거(華陽隱居)라 하였다. 천감(天監) 4년에 적금(積金)의 동쪽 계곡으로 이주하였다. 벽곡술(辟穀術)과 도인술(導引術)에 능했으며 나이가 여든을 넘었으나 젊은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대동(大同) 2년에 죽었는데, 나이가 여든다섯이었다.”라 하였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 “태청초목집요(太淸草木集要) 2권, 도은거(陶隱居) 지음.”이라 하였다. 도장(道藏) 동진부(洞眞部)의 기전류(記傳類) 용 하(龍下)에 수록된 모산지(茅山志) 9에 도은거(陶隱居)가 산에서 지었다는 저술이 기록되어 있는데, 태청옥석단약집요(太淸玉石丹藥集要) 3권과 태청제초목방집요(太淸諸草木方集要) 3권이 있다.
도은송풍[陶隱松風] 도은(陶隱)은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을 가리킨다. 남사(南史) 권76 도홍경전(陶弘景傳)에 “그가 특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한 나머지 정원에 온통 소나무만 심어 놓고는 그 음향을 들을 때마다 흔연히 즐거워하였다.[特愛松風, 庭院皆植松, 每聞其響, 欣然爲樂.]”라는 기록이 있다.
도은어소성[道隱於小成] 도는 작은 성취 때문에 숨음. 여기서 작은 성취란 가치적 편견(價値的 偏見)을 말한다. 장자(莊子) 내편(內篇) 제물론(齊物論)에 “참된 도(道)는 어디에 숨었기에 진위(眞僞)가 갈리고, 참된 말은 어디에 숨었기에 시비(是非)가 갈리는 것인가? 참된 도(道)는 어디에 간들 존재하지 않겠으며, 참된 말은 어디에 있은들 옳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된 도(道)는 작은 성취에 가려지고 참된 말은 화려함[榮華]에 가려진다.[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라고 하였다.
도은해상[逃隱海上] 진(秦) 나라 군사를 물리친 뒤 조(趙) 나라 평원군(平原君)이 노중련(魯仲連)을 위해 주연을 베풀고 천금(千金)으로 축수(祝壽)를 하자, 노중련이 “이를 받는다면 장사꾼 같은 사람이 된다.”면서 떠나갔고, 요성(聊城)을 함락시킨 뒤 제(齊) 나라 전단(田單)이 봉작(封爵)을 가하려 하였으나 “남에게 굽히면서 부귀를 누리기보단 빈천하더라도 내 마음대로 사는 게 낫다.”면서 바닷가로 도망쳐 숨은 고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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