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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잠[道潛], 도잠건[陶潛巾], 도잠녹주[陶潛漉酒], 도잠삼경[陶潛三徑]


도잠[陶潛]  도연명(陶淵明). 동진(東晉) 말기부터 남조(南朝) 송(宋: 유송劉宋) 초기 사람이다. 시인이자 문학가로 청신하고 자연스러운 시문으로 시명을 얻었다. 강주(江州) 심양(尋陽) 시상(柴桑)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원량(元良)이며, 호(號)는 오류선생(五柳先生)이다. 송(宋)나라에 와서 이름을 잠(潛)으로 바꾸었다. 일설에는 연명(淵明)이 그의 자(字)라고도 한다. 증조부 도간(陶侃)은 동진(東晉)의 개국공신으로 관직이 대사마에 이르렀으며, 조부 도무(陶茂)와 부친 도일(陶逸)도 태수를 지냈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되었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하였다. 그 후 생활을 위하여 진군참군(鎭軍參軍)·건위참군(建衛參軍)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항상 전원생활을 동경한 그는 팽택현령(彭澤縣令)이 되었으나 80여 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41세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와 문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칭하였다. 고향에 은거한 뒤에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63세에 세상을 떴다. 그의 사후에 평소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들이 그에게 정절선생(靖節先生}이란 시호를 주어 불렀다.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고금의 은일시인 가운데 첫머리[古今隱逸詩人之宗]”라 평가했을 만큼 그의 시풍이 중국문학사에 남긴 영향이 매우 크다. 주요 작품으로 음주(飮酒)·귀원전거(歸園田居)·도화원기(桃花源記)·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귀거래사(歸去來辭) 등이 있다. 도연명이 직접 지은 만사는 고금사문유취(古今事文類聚)에 의만가사(擬挽歌辭)라는 제목으로 3수가 실려 있다. 저서에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있다.

도잠[道潛]  북송(北宋)의 시승(詩僧)으로 속성은 하씨(何氏)이고 자는 참요(參寥)이며 어잠(於潜: 현재의 저장折江 임안臨安) 부촌(浮村)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한 뒤 원우(元祐) 연간(1086~1094)에 항주(杭州) 지과선원(智果禪院)에 주석했다. 소식(蘇軾) 등과 시를 주고받으며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교유하였고, 소식이 유배를 떠났을 때는 소식을 유배지로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장방기(張邦基)란 사람은 묵장만록(墨莊漫錄)이란 저서에서 담잠(曇潛)이란 원래 이름을 소식이 도잠(道潛)으로 바꿔주었다고 적고 있다. 시의 풍자 내용이 문제가 되어 강제로 환속되었다가 소식이 세상을 뜬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에 승려 신분을 회복했다. 조정에서 묘총대사(妙總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참료자시집(參寥子詩集)을 남겼다.

도잠건[陶潛巾]  진(晉) 나라 때 도잠이 뜻이 매우 고상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와 야인(野人) 옷차림에 갈건(葛巾)을 쓰고 다녔는데, 술자리를 만나면 문득 갈건을 벗어 가지고 술을 걸러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쓰곤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宋書 隱逸傳>

도잠녹주[陶潛漉酒]  도잠이 머리에 갈건(葛巾)을 썼다가 술이 익으면 갈건을 벗어서 술을 걸러서 마시고는 다시 그 갈건을 머리에 썼다는 고사가 전한다. 도잠의 갈건을 녹주관(漉酒冠), 녹주옹(漉酒翁)이라고도 한다.

도잠방애주[陶潛方愛酒]  도잠이 원래 술을 좋아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역시 술을 좋아하는 자신을 도잠에 빗대서 한 말이다. 소식(蘇軾)의 시 승주과가수수각(乘舟過賈收水閣)에 “술을 좋아한 이는 도원량이요, 시를 잘한 이는 장지화로다.[愛酒陶元亮, 能詩張志和.]”라고 하였다.

도잠삼경[陶潛三徑]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세 오솔길이란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일찍이 자기 문정(門庭)에 세 오솔길을 내놓고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종유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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