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도잠오류문[陶潛五柳門], 도잠오작비[陶潛悟昨非], 도잠절요[陶潛折腰]


도잠오류문[陶潛五柳門]  도잠(陶潛)은 진(晉)의 고사로 자는 원량(元亮)이다. 도잠(陶潛)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선생은 어디 사람인지 알 수 없고, 또한 그 성자도 알 수 없다. 집 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어 그것으로 호를 삼았다. 한정하여 말이 적었고 영리를 사모하지 않았으며,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세세히 따지려 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흔연히 밥 먹는 것을 잊었다.[先生不知何許人也,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閒靜少言, 不慕榮利, 好讀書, 不求甚解, 每有會意, 欣然忘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晉書 陶潛傳·陶靖節集>

도잠오작비[陶潛悟昨非]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실로 길을 헤맸으나 아직 멀리 가진 않았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 글렀음을 깨달았노라.[實迷途其未遠 覺今是而昨非]”라고 하며 자신의 용퇴(勇退)를 자축했다.

도잠위진처사[陶潛爲晉處士]  도잠(陶潛)은 자(字)가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며, 혹은 이름이 원량(元亮)이고 자(字)가 연명(淵明)이라고도 하는데, 잠(潛)은 은둔한 뒤에 고친 이름이다. 진(晉)나라 말기에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으나 상급관서의 아전에게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여 80일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돌아왔으며, 뒤에 유유(劉裕)가 진(晉)나라를 멸망하고 송(宋)나라를 세우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은둔하니, 시호(諡號)가 정절(靖節)이다. 양웅(揚雄)은 전한(前漢) 말기 사람으로 당세에 유명한 학자였으나 왕망(王莽)이 정권을 찬탈하자 역적인 왕망(王莽)에게 붙어 극진미신론(劇秦美新論)을 지어 왕망(王莽)을 찬양하였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도연명(陶淵明)이 죽은 대문(大文)에는 “진(晉)나라의 처사(處士)인 도잠(陶潛)이 죽었다.[晉處士陶潛卒]”고 하였고, 양웅(揚雄)이 죽은 대문(大文)에는 “왕망(王莽)의 대부(大夫)인 양웅(揚雄)이 죽었다.[莽大夫揚雄死]”고 하였다.

도잠절요[陶潛折腰]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도연명陶淵明)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현(縣)을 순시하게 되었다.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衣冠)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자, 도잠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의 하찮은 녹봉(祿俸) 때문에 허리를 굽혀서 향리(鄕里)의 소인(小人)을 정성으로 섬길 수는 없다.[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라 하고, 마침내 현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인 율리(栗里)로 돌아갔다고 한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