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잠채국[陶潛采菊] 도잠(陶潛)은 진(晉)나라 때 고사(高士)로, 자가 연명(淵明)이다. 일찍이 중양절에 좋아하는 술도 없이 울타리 가의 국화를 따면서 하염없이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때마침 자사(刺史) 왕홍(王弘)이 보낸 백의 사자(白衣使者)가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취하도록 마시고 돌아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참고로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히 남쪽 산을 바라보누나.[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3 飮酒>
도잠취[陶潛趣] 진(晉) 나라 때 고사(高士)인 도잠(陶潛)은 본디 음률을 알지 못하여 줄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가지고서 술이 거나할 때마다 어루만지며 자기의 뜻을 부쳤다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한가로이 은거하는 정취를 의미한다. 송서(宋書) 은일열전(隱逸列傳) 도잠(陶潛)에 “연명(淵明)은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나 장식도 줄도 없는 거문고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술을 마실 때마다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潛不解音聲, 而畜素琴一張, 無弦, 每有酒適, 輒撫弄以寄其意.]”라고 하였다. 이백(李白)의 시 증임명현령호제(贈臨洺縣令皓弟)에 “도잠은 팽택 영을 그만두고 떠나, 아득히 태곳적 마음을 지녀서, 오묘한 소리가 절로 곡조를 이뤘기에, 단지 줄 없는 거문고만 탔었다네.[陶令去彭澤 茫然太古心 大音自成曲 但奏無絃琴]”라고 하였다. <李太白集 卷8> <晉書 卷九十四 陶潛傳>
도잠피속옹[陶潛避俗翁] 두보(杜甫)의 시 견흥(遣興) 5수 가운데 도잠(陶潛)을 두고 읊은 시에 “도잠은 세속을 피한 늙은이일 뿐, 꼭 도리를 통달한 건 아니로다. 그의 시문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역시 꽤나 곤궁함을 한탄했으니, 생사 초월을 어찌 만족히 했으랴, 묵묵히 도를 기억함도 안 일렀으리. 자식들의 어짊과 어리석음을, 왜 또 마음에 두었단 말인가.[陶潛避俗翁 未必能達道 觀其著詩集 頗亦恨枯槁 達生豈是足 默識蓋不早 有子賢與愚 何其掛懷抱]”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도잠항[陶潜巷] 도잠(陶潛)의 거리. 도잠은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다. 그의 잡시(雜詩)에 “사람이 사는 지역에 집을 지었건만,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 없어라.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여 이럴 수 있는가. 마음이 속세와 머니 지역이 절로 외지네.[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라고 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도잠해인[陶潛解印]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이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을 때, 마침 군(郡)의 독우(督郵)가 현(縣)을 순시하게 되어, 아전이 도잠에게 의관을 갖추고 독우를 뵈어야 한다고 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오두미(五斗米)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혀서 향리의 소인(小人)을 섬길 수 없다.[我不能爲五斗米, 折腰向鄕里小兒.]”고 하고, 마침내 현령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解印] 즉시 떠나면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어 뜻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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