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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고적[道州考績], 도주공[圖周公], 도주공[陶朱公]


도주고적[道州考績]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양성(陽城)이 당죄인(黨罪人)으로 몰려 도주자사(道州刺史)로 좌천되었는데, 고을의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풀고, 관리의 성적을 고과(考課)할 때에 스스로 고과 문서에 쓰기를 “백성들을 어루만지느라 마음은 수고롭지만 세금을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일에는 졸렬하니, 고적은 하하(下下)에 해당한다.[撫字心勞 徵科政拙 考下下]”라고 하였던 것을 말한다. <舊唐書 卷192 陽城傳>

도주공[圖周公]  주공 그림. 한(漢)나라 때의 대장군(大將軍). 큰 공업(功業)을 이룬 무제(武帝) 때부터 중흥(中興)을 이룬 선제(宣帝) 때까지 한실(漢室)을 부지하고 빛낸 충신(忠臣). 무제(武帝) 때에 봉거 도위(奉車都尉)로 궁중에 출입한 20여 년 동안에 매우 삼가서 과실이 없었다. 무제가 어린 아들 불릉(弗陵 소제昭帝)으로 제위(帝位)를 잇게 하고자 할 적에 여러 신하 중에서 곽광이 가장 부탁할 만하므로, 황문(黃門)의 그림 그리는 자를 시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모시고 제후에게 조회받는 그림을 그려서 곽광에게 내렸다. 무제가 죽자 곽광이 유조(遺詔)를 받들어 그때 8세인 소제를 즉위시키고 도우니, 정사는 모두 곽광의 손으로 처결되었다. 곽광이 정사를 맡은 13년 동안 모반(謀叛)을 다스리고 과세(課稅)를 가볍게 하고 전매(專賣)를 폐지하여 백성의 휴양(休養)에 힘썼으므로 백성이 충실해지고 사방의 오랑캐가 조공을 바쳤다. 소제가 후사(後嗣)없이 죽으매 창읍왕하(昌邑王賀)를 즉위시켰으나, 음란하므로 폐위시키고 여염에 있던 무제의 증손 순(詢 선제宣帝)을 영립(迎立)하였다. <漢書 霍光傳>

도주공[陶朱公]  도주공은 춘추(春秋)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모신(謀臣)인 범려(范蠡)의 별칭이다. 월왕이 오왕(吳王) 부차(夫差)로부터 회계(會稽)에서 치욕을 당한 후, 범려가 미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미인계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월왕 구천이 범려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범려에게 말하기를 “내 장차 그대와 더불어 나라를 나누어 가질 것이다.”라고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임금은 명령을 행하고 신하는 뜻을 행하는 법입니다.”라고 하였다. 구천은 월왕과는 더불어 안락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하루아침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서시(西施)를 데리고 서호(西湖)에 배를 띄워 떠나 버렸는데, 제(齊)나라에 들어가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姓名)을 바꾸고 무역과 농목(農牧)에 종사하여 부자가 되었다. 제왕(齊王)이 그를 승상으로 삼자, 범려는 승상인(丞相印)을 돌려주고 재물을 다 흩어 친지와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어진 일을 하고서, 도(陶)로 가서 주공(朱公)이라 칭하며 치산(治産)을 잘하여 거부(巨富)를 이루었다. 노(魯)나라의 부인(富人) 의돈(猗頓)이 일찍이 매우 가난했을 때, 도 주공이 거부란 말을 듣고 그에게 찾아가서 부자가 되는 지혜를 묻자, 도주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속히 부자가 되고 싶으면 소, 말, 돼지, 양, 당나귀의 다섯 가지 암컷[五牸]을 길러야 한다.”고 하므로, 의돈이 그대로 시행하여 그 역시 거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史記 卷129 貨殖列傳>

도주공[陶朱公]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 범려(范蠡)를 이른다. 자는 소백(少伯)이고 치이자피(鴟夷子皮) 혹은 도주공(陶朱公) 등의 다른 이름이 있다. 생졸 연도는 불확실하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을 도와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격파하고 패업을 달성하게 한 후에는 이름과 성을 숨기고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 월나라를 떠나 있던 범려는 월나라에서 함께 일한 대부 문종(文種)에게 “하늘을 날던 새를 잡고 나면 활은 거둬 감춰지고,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하던 개는 삶아져 먹힙니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이 새의 부리를 닮았으며 매처럼 보고 이리처럼 걷습니다. 그런 사람과는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장차 그대를 해하게 될 것입니다.[高鳥已散, 良弓將藏; 狡兔已盡, 良犬就烹. 夫越王為人, 長頸鳥喙, 鷹視狼步, 可與共患難而不可共處樂, 子若不去, 將害於子.]”라고 서신을 보냈다. 문종은 범려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그는 결국 월왕의 의심을 사 목숨을 잃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바다로 나아가 제(齊)나라 땅에 도착한 범려는 그곳에서 경영과 농업과 상업으로 그때마다 큰 재산을 모았다. 그는 세 차례 모두 일군 재산을 가난한 친구들과 소원한 친척들에게 나눠주었다. 최후로 큰 재산을 모은 범려는 도읍(陶邑)이란 곳에 거처를 정하고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하며 살았다. 그가 큰 부를 이뤘을 때, 노(魯)나라 사람 의돈(猗頓)이 그를 찾아와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묻자 범려가 ‘암소 다섯 마리를 기르라’고 알려주었고, 이 말을 듣고 따른 의돈은 십 년 뒤에 큰 부자가 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이 천하의 부자를 말할 때 도주(陶朱) 또는 의돈(猗頓)이라고 했다. 후대의 상인들이 범려의 상을 세우고 그의 공덕을 기리며 재신(財神)으로 받들어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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