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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혼식[陶婚式], 도홍경[陶弘景], 도홍유록[桃紅柳綠], 도홍자[陶泓子]


도혼식[陶婚式]  도자기혼식(陶磁器婚式). 결혼(結婚) 기념식(記念式)의 하나. 혼인(婚姻)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을 축하(祝賀)하여 부부(夫婦)가 사기(沙器) 제품(製品)을 선물(膳物)로 주고받아 기념(記念)한다.

도홍[陶泓]  도홍(陶泓)은 벼루의 별칭으로, 벼루 안에 물을 담는 곳이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유(韓愈)의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권36 모영전(毛穎傳)에 “모영(毛穎)이 강인(絳人) 진현(陳玄), 벼루의 명산지인 홍농인(弘農人) 도홍(陶泓), 회계인(會稽人) 저선생(楮先生)과 친밀하여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어 나아가고 물러감을 함께하였다.[穎與絳人陳玄, 弘農陶泓, 及會稽褚先生友善, 相推致, 其出處必偕.]

도홍경[陶弘景]  남북조(南北朝) 양(梁) 나라 무제(武帝) 때의 말릉(秣陵) 사람이다. 자는 통명(通明), 호는 화양은거(華陽隱居), 또는 화양진일(華陽眞逸), 시호는 정백선생(貞白先生)이다. 천성이 저술을 좋아하고 기이한 것을 숭상하였다. 1만권의 서적을 독파하였고 금기(琴棋)·도술(道術)·음양(陰陽)·오행(五行)·지리(地理)·의술(醫術)·본초(本草)에 정통하였다. 젊었을 때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을 읽고 양생(養生)의 뜻을 품었다. 뒤에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여 화양은거(華陽隱居)라 자호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본초(本草)에 주를 달고 혼천상(渾天象)을 만들었으며 제대연력(帝代年歷)등의 저술이 있다. 특히 솔바람 소리를 좋아하여 뜨락 가득 소나무를 심고는 매번 그 소리를 들으면서 좋아하였다. 나이 85세에 병도 없이 죽었는데, 혹은 신선이 되어 갔다고 전한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도홍경[陶弘景]  남제(南齊)와 남양(南梁) 때, 도교(道敎) 모산파(茅山派)의 대표적 인물인 동시에 저명한 의학자이다. 자는 통명(通名)이고 화양은거(華陽隱居)를 자호로 썼으며 단양(丹陽) 말릉(秣陵: 지금의 강소江蘇 남경南京)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다섯 살 때 심산지(尋山志)를 지었다. 스무 살에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서른 중반에 구곡산(句曲山: 모산茅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불렀으나 큰일이 있을 때 몇 차례 자문에 응했을 뿐 끝내 나아가지 않은 그를 사람들이 산중재상(山中宰相)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상은 노장철학과 갈홍(葛洪)의 신선도교(神仙道敎)를 벗어나 유가와 불가까지 흡수하였다. 초서와 예서, 행서 등에 고루 능했고 역법과 지리, 의약 등의 분야에서도 경지를 이루었다. 고대의 신농백초경(神農百草經)을 정리하고 본초경집주(本草經集注) 7권을 증수함으로써 본초학 발전에 공헌했다. 도은거집(陶隱居集) 1권이 전한다.

도홍유록[桃紅柳綠]  붉은 복사꽃 푸른 버들은 봄 경치를 말한 것으로,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의 시 전원락(田園樂)에 “붉은 복사꽃은 다시 지난밤 비를 머금었고, 푸른 버들은 또한 봄 연기를 띠었도다.[桃紅復含宿雨 柳綠更帶春煙]”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王右丞集 卷14>

도홍자[陶泓子]  도제(陶制)의 벼루를 의인화하여 일컫는 말이다.

도홍진[道興津]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에서 창녕군 남지로 건너다니는 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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