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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桃花洞], 도화랑[桃花浪], 도화림[桃花林]


도화동[桃花洞]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湛軒書) 외집 권9의 연기(燕記)에 의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남쪽 한 굽이를 도화동(桃花洞)이라고 하는데, 그 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산꼭대기의 꽤 펀펀한 곳에 복숭아나무가 꽉 들어 차 있다고 하였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는 산 이름이다. 순(舜) 임금이 십이산(十二山)을 봉할 때에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고, 산세(山勢)가 6리를 덮으므로 육산(六山)이라고도 한다.

도화동[桃花洞]  도화동(桃花洞)은 진나라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도화원(桃花源)을 이른다. 무릉군(武陵郡)의 어부가 복사꽃이 흘러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곳이 워낙 선경이라서 바깥세상의 변천과 세월의 흐름도 잊고 살았다고 한다. <陶淵明集 卷6>

도화동[桃花洞]  산당사고(山堂肆考) 권17에 “도원산(桃源山)은 형주부(衡州府) 도원현(桃源縣)의 남쪽에 있다. 진(秦)나라 시대에 천여 명이 도원동에 들어가 피난하다가 그냥 눌러 살았다.[桃源山在 衡州府桃源縣南 秦時有千餘人 入洞避難因隠於此]”라고 하였다.

도화동[桃花洞]  한양의 북악(北岳) 아래에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으므로 도화동이라 했다. 청헌(淸軒) 문성(文晟)이 이 동리에 살았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옛 집터도 있었다. <漢京識略 卷2 名勝>

도화랑[桃花浪]  도화랑(桃花浪)은 복사꽃이 필 무렵에 얼음이 녹고 비가 내리고 하여 벌창해진 이는 하천의 물을 가리킨다. 도화수(桃花水)라고도 한다. 도화랑이 일 때면 용문(龍門)에서 잉어가 뛰어오르는데 넘으면 용이 되며 용이 될 때에는 우레가 고기의 꼬리를 불태워 없앤다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 춘수(春水)에 “삼월의 복사꽃 물결, 강물은 옛 자취 회복하네.[三月桃花浪 江流復舊痕]”라고 하였다.

도화림[桃花林]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의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갑자기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나 그곳에 들어가서, 일찍이 선대(先代)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느리고 그곳에 들어와 대대로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람들을 만나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수일 후에 그곳을 떠나서 배를 얻어 타고 다시 길을 되돌아왔는데, 그 후로는 다시 그 도화림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陶淵明集 卷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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