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獨樂] 한가한 전원의 생활을 이른다. 송나라 재상 사마광(司馬光)이 벼슬을 그만둔 뒤에 낙양(洛陽) 남쪽 교외에 조성한 독락원(獨樂園)이라는 자그마한 정원을 지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독락당[獨樂堂] 독락당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사랑채로 현재 경주(慶州) 안강(安康)의 옥산리(玉山里)에 있으며, 회재를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안쪽 계곡에 위치해 있다.
독락락[獨樂樂]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與人樂樂]’에 상대되는 말로, 혼자서 음악을 즐길 경우[獨樂樂]에는 백성들이 그 음악 소리를 듣고서 모두 골치를 앓고 이맛살을 찌푸린다는 말이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맹자(孟子) 하(梁惠王下)에, 맹자가 음악을 좋아한다는 양혜왕(梁惠王)에게 “혼자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즐겁습니까?[獨樂樂 與人樂樂 孰樂]”라고 물으니, 왕이 “남들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하다.[不若與人]”고 답하였다. 이에 다시 “소수와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과 대중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즐겁습니까?[與少樂樂 與衆樂樂 孰樂]”라고 묻자, 왕이 “대중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하다.[不若與衆]”고 답했다고 한다.
독락사[獨樂寺] 계주성(薊州城) 안에 있는 절이다. 계주(薊州)의 서쪽에 있는 원나라 때 창건한 절이다. 10길 남짓 되는 입불(立佛)이 장대하여 많은 사신들이 이곳에 들러 구경하고 관련 기록을 남겼다. 황금으로 된 와불(臥佛)도 있어서 일부 사행 기록에는 와불사(臥佛寺)로 기록되어 있다.
독락원[獨樂園] 독락원은 송(宋)나라 때의 명상(名相) 사마광(司馬光)의 원명(園名)이다. 사마광의 자는 군실(君實), 호는 제물자(齊物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반대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추밀부사(樞密副使)의 관직에서 물러나 낙양(洛陽)에 살면서 국자감(國子監) 곁에 땅을 얻어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15년 동안 한가로이 지냈다. 또한,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지어 스스로 한가로이 물러나 지내는 즐거움을 적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독락원[獨樂園] 낙양(洛陽) 교외에 있던 사마광(司馬光)의 원림(園林) 이름이다. 이격비(李格非)의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 독락원(獨樂園)에 “사마온공이 낙양에 있을 때 스스로 호를 우수라 하고 원림을 독락원이라 했는데, 원림이기는 하지만 작아서 다른 원림 같지 않았다.[司馬溫公在洛陽, 自號迂叟. 其園曰獨樂園, 園卑小, 不可與他園班.]”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시 사마군실독락원(司馬君實獨樂園)에 “동이 술로 남은 봄을 즐기고, 바둑으로 긴 여름을 보내는구나.[樽酒樂餘春, 棋局消長夏.]”라고 하였다.
독락진[獨樂津] 금강에 있는 나루 중의 하나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민진강(閔鎭綱)의 초산일기(楚山日記)에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송시열을 운구하는 과정에서 이 나루의 이름이 보인다. <宋子大全 續拾遺附錄 卷2>
독련[獨憐] 유독 사랑스럽다.
독례[讀禮] 거상(居喪)을 뜻한다. 옛날에 초상을 당하면 거상(居喪)중에 상례 및 제례와 관계된 예서(禮書)를 읽었으므로 상을 치르는 것을 독례(讀禮)라고 한다. 예기(禮記) 곡례 하(曲禮下)에 “장사 지내기 전에는 상례(喪禮)를 읽고 장사 지낸 뒤에는 제례(祭禮)를 읽는다.[未葬讀喪禮, 旣葬讀祭禮.]”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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