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불견[獨不見] 악부(樂府) 잡곡가사(雜曲歌辭)의 구제(舊題)로 악부해제(樂府解題)에 “독불견은 가슴이 미어지게 그리워도 볼 수 없는 것이다.[獨不見, 傷思而不見也.]”라고 하였다. 남조(南朝) 양(梁)나라의 유운(柳惲)이 처음 지은 것으로, 당나라 이백(李白) 등의 작품이 있다. 한나라 진 황후(陳皇后)가 무제(武帝)에게 버림받고서 군왕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진 황후가 소박을 맞고 장문궁(長門宮)에 유폐되어 지내다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문장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100근(斤)의 황금을 보내어 글을 요청하자 사마상여가 장문부(長門賦)를 지어 주었는데, 황후의 고독하고 처량한 처지와 간절한 사모의 정이 잘 드러난 이 글을 읽은 한 무제가 다시 진 황후를 총애했다고 한다. <文選 卷8>
독불장군[獨不將軍] 혼자서 장군(將軍)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의논하거나 협조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일을 이루기란 매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이다. 또는, 자기주장이 강하여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만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을 비난조로 이르기도 한다.
독불장군[獨不將軍] 혼자서는 장군(將軍)을 못한다는 뜻으로, 혼자서는 다 잘할 수 없으므로 남과 협조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 저 혼자 잘난 체하며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비유(比喩)하기도 하고, 저 혼자 잘난 체하며 뽐내다가 남에게 핀잔을 받고 고립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르기도 한다.
독비[篤棐]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함을 일컫는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군석(君奭)에 주공(周公)이 소공(召公)에게 말하기를 “임금을 독실하게 보좌할 사람은 나와 그대 두 사람뿐이다.[篤棐 時二人]”라고 하였다.
독비곤[犢鼻褌] 쇠코잠방이. 베로 허리 전면을 덮고 뒤로 돌려 매었다. <漢書 司馬相如傳 犢鼻褌注> 사기(史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임공으로 가서 말과 수레를 모두 팔아 술집 하나를 사들여 술장사를 했다. 문군에게는 노(鑪: 흙을 쌓아올려 술을 담을 수 있는 화로)에 앉아 술을 팔도록 하고, 상여 자신은 독비곤(犢鼻褌)을 입고 머슴들과 함께 허드렛일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닦았다. 탁왕손은 이 소문을 듣고 부끄러워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相如與俱之臨邛, 盡賣其車騎, 買一酒舍酤酒, 而令文君當爐. 相如身自著犢鼻褌, 與保庸雜作, 滌器於市中. 卓王孫聞而恥之, 爲杜門不出.]”라고 한 데서 보인다. <漢書 司馬相如傳>
독비곤[犢鼻褌]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함(阮咸)은 길 남쪽에 살고, 다른 완씨(阮氏)들은 길 북쪽에 살았는데, 북쪽에 살던 완씨들은 다 부유했고, 남쪽에 살던 완씨는 빈곤했던바, 한번은 7월 7일에 북쪽의 부유한 완씨들이 좋은 비단옷들을 밖에 내다가 포쇄(曝曬)하자, 완함은 거친 베로 지은 쇠코잠방이[犢鼻褌]를 간대 끝에 걸어 마당 가운데 내다가 포쇄했던 고사가 있다.
독비단[犢鼻襌] 독비곤, 진(晉) 나라 때 길 남북쪽에 사는 완씨(阮氏)는 부자들이요, 길 남쪽에 사는 완씨는 가난하였다. 완중용(阮仲容)은 남쪽에 살았다. 당시의 풍속에 칠월칠석에는 집집마다 옷을 내어 높이 걸어 햇볕을 쪼이는데, 북쪽 완씨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내어 걸었다. 완중용은 좋은 옷이 없으므로 굵은 베로 만든 쇠코중이[犢鼻襌]를 긴 장대에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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