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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려[敦厲], 돈망환정[頓忘宦情], 돈모철개[頓牟掇芥], 돈목지의[敦睦之誼]


돈려[敦厲]  고무하다. 권면하다. 혹은 장려하다. 敦勵(돈려)로도 쓰인다. 안씨가훈(顔氏家訓) 면학(勉學) 편에 “무릇 육경(六經)의 요지를 밝히고 백가(百家)의 서적을 섭렵하는 것이 설사 덕행(德行)을 증익(增益)시키거나 풍속(風俗)을 고무(鼓舞)시켜 줄 수는 없더라도, 오히려 한 가지 기예(技藝)로 삼아 그것으로 자신이 살아갈 밑천을 얻을 수는 있다.[夫明六經之指, 涉百家之書, 縱不能增益德行, 敦厲風俗, 猶爲一藝, 得以自資.]”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돈려[頓蠡]  춘추 시대 때 부호(富豪)로 소문난 의돈(猗頓)과 범려(范蠡)의 병칭(幷稱)이다. 의돈은 노(魯)나라 사람인데, 어려서 몹시 가난하였으나 범려에게 돈 버는 법을 배워 소금 장사를 하여 왕후(王侯)에 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범려는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 구천(句踐)을 섬겨 오(吳)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구천의 사람됨이 환란은 함께할 수 있으나 안락은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여겨 배를 타고 제(齊)나라로 가서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바꾸고 재산을 수천만 금이나 모았다. 제나라에서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정승을 삼고자 하자, 그는 다시 모았던 재물을 다 흩어 나누어 준 다음 도(陶)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호(自號)하고는 또다시 수천만 금의 재물을 모았다고 한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돈망환정[頓忘宦情]  돈망(頓忘)은 갑자기 잊음, 까맣게 잊어버리다. 즉, 벼슬살이에 대한 생각을 문득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말이다. 송나라 손광헌(孫光憲)의 북몽쇄언(北夢琐言)에 “당나라 공증 시랑이 유보가 되었을 때, 조정에서 돌아오다 비를 만났는데 비옷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에 길가 노인의 집 처마 아래로 피했다.……(공증이) 비옷을 빌리려고 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나는 추우면 나가지 않고, 더우면 나가지 않고, 바람 불면 나가지 않고, 비오면 나가지 않으니 비옷을 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점포에서 가져오라 해놓았으니, 빌려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공은 자신도 모르게 문득 벼슬살이를 할 뜻을 잊었다.[唐孔拯侍郞作遺補時 朝回遇雨 不齎油衣 乃避雨於坊叟之廡下……且借油衣 叟曰 某寒不出 熱不出 風不出 雨不出 未嘗置油衣 然已令鋪上取去 可以供借也 孔公賞羨 不覺頓忘宦情]”라고 한 데서 보인다. 유의(油衣)는 오동기름을 바른 비옷이다.

돈모철개[頓牟掇芥]  친구 사이에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이른다. 한(漢)나라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 권16 난룡(亂龍)에 “호박(琥珀)은 지푸라기를 달라붙게 하고, 자석은 바늘을 끌어당긴다.[頓牟掇芥, 磁石引針.]”라고 하였다.

돈목[敦睦]  친밀하게 하다. 화목하게 하다. 사이좋게 하다. 친후(親厚)하고 화목(和睦)함이다.

돈목지의[敦睦之誼]  돈목(敦睦)한 정의(情誼). 일가친척 사이에 오가는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이른다.

돈물[惇物]  돈물은 남산 부근에 있는 산 이름인데, 일설에는 남산은 토산물이 많이 나기 때문에 남산의 형용사라 하기도 한다. 서경(書經) 우공(禹貢)편에 “종남산과 돈물산에서 조서산(鳥鼠山)에 이른다.[終南惇物 至于鳥鼠]”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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