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객성[桐江客星] 엄자릉(嚴子陵)은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소년 시절 친구이기도 한 은사(隱士) 엄광(嚴光)의 자이다. 광무제(光武帝)가 등극한 이후 엄광은 광무제의 간곡한 부름도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 아래 은거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동강(桐江)에서 낚시질을 하면서 살았다. 그가 한번은 광무제의 간청으로 대궐에 들어가 광무제와 함께 옛일을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누워 자면서 광무제의 배 위에 발을 얹기까지 했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천문(天文)을 맡은 태사(太史)가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매우 가까이 범했다.[客星侵御座]”고 아뢰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나의 친구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누워 잤다.[朕與故人嚴子陵共臥耳]”라고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嚴光>
동강고수[東岡固守]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뜻이 굳다는 말이다. 동강(東岡)은 동쪽의 산 언덕으로 세상을 마다하고 은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주섭열전(周燮列傳)에, 은사(隱士)인 주섭(周燮)을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그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의 종족들이 그에게 “선세(先世) 이후로 국가에 대한 공로와 임금의 은총으로 대를 이어 왔는데, 어찌하여 그대 혼자 동강(東岡)의 언덕만을 지키려고 하는가?[自先世以來 勛寵相承 君獨何爲守東岡之陂乎]”라고 말한 데서 온 것이다. 동강은 주섭의 선인(先人)이 초가집을 지어놓은 동쪽 산등성이이다.
동강관[動江關] 강관(江關)은 강남(江南)과 같은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 영회고적(詠懷古跡)에 북주(北周) 때 유신(庾信)이 애강남부(哀江南賦)를 읊은 것에 대해 “유신은 평생에 몹시 쓸쓸했는데 늘그막에 시부가 강관을 진동했네.[庾信生平最蕭瑟 暮年詩賦動江關]”라고 하였다. 경동해내(驚動海內).
동강구진[東江舊鎭]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설치했던 가도(椵島)의 진영을 말한다.
동강도[董江都] 강도는 한 무제(漢武帝)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동중서(董仲舒)가 한 무제(漢武帝) 때 강도왕(江都王)의 상(相)을 지냈기 때문에 동강도(董江都)라고 한 것이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그는 처음에 강도의 상(相)이 되었는데 공손홍(公孫弘)의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상(相)으로 좌천되었다. 무제(武帝)에게 상주(上奏)하여 유교(儒敎)를 국교로 정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에 춘추번로(春秋繁露)가 있다.
동강도[董江都]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강도상(江都相)을 지낸 동중서(董仲舒)를 가리킨다. 공손홍(公孫弘)에게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승(丞)으로 좌천되고,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저술에 힘쓰다 생을 마쳤다. 무제에게 이른바 천인삼책(天人三策)의 글을 올려 공자의 저술이 아닌 다른 학술들은 모두 배척하도록 건의한 결과, 한 무제가 백가를 축출하고 육경을 드러내 밝히게 되었다고 한다. <漢書 卷6 武帝紀, 卷56 董仲舒傳> 동중서는 뛰어난 유학자로서 조정에서 유학자가 아닌 학자들을 모조리 쫓아낼 것을 건의하여 유교가 한나라의 사상적 바탕이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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