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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부[東京賦], 동경위적[東京僞籍], 동경이두[東京李杜], 동경청의[東京淸議]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북송(北宋)의 수도(首都)인 변경(卞京)의 번화한 모습을 기록한 책으로, 총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송(南宋)시대 맹원로(孟元老)의 저술이라 하는데, 작자의 본명과 전기(傳記)는 미상이다. 이 책은 1147년(소흥 17)에 완성되었으며, 북송 말 변경의 상업 및 민간의 풍속에 관한 유명한 필기이다. 따라서 건축, 하거(河渠), 가항(街巷), 상점, 주루(酒樓), 화물, 야시(夜市), 음식, 풍속 등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음식부분을 살펴보면, 변경에는 백만 명 이상의 인구가 있었다. 이 도시의 인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이곳은 성내의 유동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각종 음식점이 각 거리에 즐비하였다. 특히 각 음식점들은 나름의 특색을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가항 건축 분야에서는 변경 외성과 내성의 정황과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교통 분야에서는 육상교통수단, 즉 차(車), 그리고 차의 구조 등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상업 야시분야에서는 각 거리의 상점과 무역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동경부[東京賦]  동경부(東京賦)는 낙양(洛陽)의 풍물을 읊은 부로 동한의 장형(張衡)이 지었다. 장형은 자가 평자(平子)로 남양(南陽) 하남(河南) 서악(西鄂) 사람으로 동한 시대의 주요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뛰어난 과학 사상가였다. 동경부(東京賦) 외에도 서경부(西京賦), 남도부(南都賦)가 유명하다.

동경위적[東京僞籍]  동경(東京)은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을 뜻한다. 환제(桓帝) 때 당고(黨錮)의 화(禍)가 일어나 환관들이 진번(陣蕃), 이응(李膺) 등 우국지사(憂國之士)를 ‘조정을 반대하는 당인(黨人)이다’라고 몰아세워 이들을 옥에 가두고 그 벼슬길을 막았는데, 이것을 비유하여 기묘사화 때 송재공(松齋公)이 거꾸로 위학(僞學)이라고 배척당하여 화를 당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동경이두[東京李杜]  동경은 후한의 수도 낙양을 말한다. 이두(李杜)는 후한 때의 명신들인 이응(李膺)과 두밀(杜密)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응은 ‘천하의 모범[天下楷模]’, 두밀은 ‘천하의 보필[天下良輔]’이라는 추앙을 받았다. 환관(宦官)의 전권(專權)을 반대하다가, 영제(靈帝) 건녕(建寧) 2년(169)에 환관들로부터 이른바 ‘당고(黨錮)의 화’를 당한 끝에, 이응은 옥사(獄死)하고 두밀은 자결하였다. <後漢書 卷67 黨錮列傳>

동경잡기[東京雜記]  조선 중기 문신인 이채(李埰)가 1669년(현종10) 경주 부윤 민주면(閔周冕) 등과 함께 편찬하고 간행한 경주 지역의 풍물 지리지이다.

동경재자[東京才子]  동경인 낙양에서 문장으로 뛰어난 사람, 즉 황보식(皇甫湜)을 가리킨다.

동경절의[東京節義]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의 일을 말한 것이다. 혜강은 위나라 때 정권을 잡은 사마씨(司馬氏)에게 항거하다가 동경인 낙양(洛陽)의 동시(東市)에서 처형당하였다.

동경청의[東京淸議]  동경은 동한(東漢)의 서울 낙양(洛陽)으로서 서한(西漢)의 서울인 장안(長安)에서 보면 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동한의 별칭으로 쓰인다. 동한 말엽부터 정치가 극도로 혼란하여 청의(淸議)를 일삼는 지식인들이 많아졌다.

동경청의[東京淸議]  일반적으로 후한(後漢)의 선비 곽태(郭太)를 이르나, 후한 때 맑은 의론을 펼치던 선비들을 두루 이르기도 한다. 동경(東京)은 동한(東漢)의 서울 낙양(洛陽)으로 동한의 별칭으로 쓰인다. 동한 말엽에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환제(桓帝) 때에 진번(陳蕃), 이응(李膺) 등이 이를 미워하여 공박했는데, 환관들은 도리어 그들을 당인(黨人)이라고 지목하여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였다. 이를 당고(黨錮)의 변이라 한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동경청의[東京淸議]  동경은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이다. 후한 초기에는 주당(周黨)과 엄광(嚴光)처럼 광무제(光武帝)의 징소(徵召)를 사절하고 은거하며 청절(淸節)을 지킨 선비가 있어서 나라의 국통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후한 말 환제(桓帝) 때에 이르러서는 환관이 정권을 잡고 휘둘러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기절(氣節)이 있는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다. 그 뒤에 결국 진(晉)나라 때 완적(阮籍) 등 방탕한 이들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後漢書 卷8 孝靈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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