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곡[銅斛] 구리로 만든 섬[斛]으로 전국에서 사용되는 말[斗]이나 되[升]의 정식 규격을 알리기 위하여 호조(戶曹)에서 구리를 부어 만든 표준 규격이다.
동곡[同谷] 지명, 즉 동곡현(同谷縣)을 이른다. 당(唐) 때 진주군(秦州郡)과 성주군(成州郡)의 치소가 있던 곳(지금의 농남시隴南市 성현成縣)이다. 두보가 동곡(杜甫)에 이르러 현령을 만나려 하였으나, 두보가 벼슬이 없고 생활이 곤궁한 것을 알고 있던 현령이 만나주지 않았다. 두보는 산 밑에 움막을 틀고 식량도 떨어진 상태에서 눈 쌓인 겨울을 나면서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를 지었다.
동곡가[同谷歌] 두보(杜甫)의 시로 원래의 제목은 건원중우거동곡현작가(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이다. 이 시는 두보(杜甫)가 48세 되던 759년(건원2) 11월부터 12월에 촉(蜀)으로 들어갈 때까지 1개월간 동곡(同谷)에 우거(寓居)하면서 그 감회를 읊은 것으로 모두 7수(首)로 구성되었는데,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과 함께 풍소(風騷)의 극치(極致)로 꼽히는 작품이다. 동곡현(同谷縣)은 감숙성(甘肅省) 진주(秦州)의 서남쪽에 있는 지명인데, 당(唐)나라 때는 성주(成州)의 속현(屬縣)이었다.
동공[董公] 동공(董公)은 한(漢)나라 때 신성(新城) 사람으로 향중(鄕中)의 교화를 관장하던 장로(長老)이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아직 천하를 통일하기 전, 낙양(洛陽)의 신성(新城)에 이르렀을 때, 삼로(三老)의 한 사람인 동공이 한왕(漢王)의 가는 길을 막고 “항우(項羽)가 무도(無道)하여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이는 천하의 적(賊)이다. 인의(仁義)는 본시 용력(勇力)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니, 대왕은 삼군을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라.”고 설득시켰다. 한왕이 비로소 의제를 위하여 상사(喪事)를 발표하자, 천하가 다 호응하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
동공[董公] 동공(董公)은 한(漢)나라 신성(新城) 사람으로 초 회왕(楚懷王)을 시해한 죄목으로 항우(項羽)를 수죄(數罪)하여 한 고조(漢高祖)에게 명분을 제시한 인물이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낙양(洛陽)의 신성(新城)에 이르렀을 때 “항우(項羽)는 자신의 주군(主君)인 초 회왕(楚懷王)을 시해한 죄인이니 군사들에게 상복(喪服)을 입혀 발상(發喪)하고 쳐야 명분이 선다.”고 역설하자, 유방(劉邦)이 그에 따라 발상하였다. 뒤에 광무(廣武)에서 열 가지 죄를 수죄(數罪)할 적에 항우가 답변을 못했고, 그 뒤 해하(垓下)에서 결국 유방에게 패하여 항우는 자살하고 말았다. <史記 卷8 高祖本紀>
동공[董公] 동공(董公)은 삼로동공(三老董公)의 한 사람으로, 한(漢)나라 때 지방의 장로(長老)로서 그 지방의 교육을 맡아 가르친 자이다.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남쪽으로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낙양(洛陽)의 신성(新城)에 이르렀을 때에 신성(新城)의 삼로(三老)인 동공이 길을 막고 한왕에게 말하기를 “항우(項羽)가 무도하여 임금을 제멋대로 죽였으니, 삼군(三軍)이 소복을 입고 이 사실을 제후에게 알린 후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정벌을 나선다면 사해(四海)가 모두 우러러볼 것입니다.”라고 하자, 한왕이 이에 의제(義帝)를 위하여 발상(發喪)하고 곡(哭)을 한 다음 제후들에게 항우 토벌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漢書 卷1 高帝紀>
동공[東公] 전설상의 해를 맡은 신이다.
동공[董公] 동월(董越). 조선 성종(成宗) 때 명(明)나라의 사신으로 와서 우리나라의 풍토를 읊은 조선부(朝鮮賦)라는 장편을 남긴 동월(董越)을 가리킨다. 그가 총수산비(蔥秀山碑)를 지었다. 이행(李荇)의 용재집(容齋集) 제4권 총수산비(蔥秀山碑)에 그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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