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곽리[東郭履] 동곽선생(東郭先生)의 낡은 신발이라는 뜻으로, 매우 가난함을 비유한 말이다. 동곽 선생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이다.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동곽 선생은 오랫동안 공거(公擧)에서 조서를 기다리고 있으면서 매우 빈곤하여 굶주리며 추위에 떨었다. 옷은 해지고 신은 완전하지 못하여 눈길을 다닐 적에도 신이 위 덮개만 있고 밑창은 없어서 발로 땅을 다 밟고 다녔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이 그를 보고 웃었다.[東郭先生久待詔公車, 貧困飢寒, 衣敝履不完, 行雪中, 履有上無下, 足盡踐地, 道中人笑之.]”라는 기록이 있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郭先生>
동곽번간[東郭墦間] 남에게 빌어서 부귀와 영달을 구하는 사람들을 이른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제(齊)나라 사람의 처가 남편이 부귀한 사람과 먹는다고 으스대고 나가서는 동쪽 성곽의 무덤들 사이에서 제사하는 자에게 남은 음식을 구걸하여 얻어먹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첩과 함께 남편을 원망하며 울었다는 우화가 실려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에 부귀를 구하는 자들은 모두 이 사람과 같아서 그 처와 첩이 본다면 부끄러워서 울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동곽번간[東郭墦間]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관직을 구걸하는 행위. 지조 없이 벼슬을 구걸하는 행위를 비유한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이야기로, 제(齊)나라 사람 중에 아내와 첩을 둔 자가 있었다. 그는 외출했다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은 뒤에 돌아오곤 하였는데, 그 아내가 누구와 먹었는가 물어보면 모두 부귀가(富貴家)의 사람이었다. 아내가 첩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외출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배불리 드신 뒤에 돌아오기에 내가 누구와 더불어 먹었는가 물어보니, 모두 부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일찍이 현달한 자가 우리 집에 찾아오는 일은 없으니, 내가 남편이 어디를 가는지 살펴보려 한다.”라 하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이 가는 곳을 몰래 따라가 보았다. 그러나 온 장안을 두루 다니는 동안 서서 말을 나누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이윽고 동쪽 성곽의 무덤 사이[東郭墦間] 제사하는 자에게 가서 남은 음식을 빌어먹더니, 거기에서 부족하면 또 둘러보고 딴 곳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동곽생[東郭生] 동곽생은 동곽선생(東郭先生)을 가리킨다. 이는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보이는 인물로, 공거(公擧)란 부서에서 오래도록 대조(待詔)하면서 매우 빈곤한 탓에 옷은 낡아서 해지고 신발은 완전하지 못하여, 눈길을 가는데 신발의 윗부분만 있고 밑창이 없어서 발이 모두 땅에 닿으니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고 한다. 빈곤한 사람을 뜻한다.
동곽서양여미[東郭書讓犁彌] 동곽서(東郭書)가 여미(犁彌)에게 양보함.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9년에 “가을에 제후가 진(晉) 나라 이의(夷儀) 지방을 쳤다. …… 동곽서(東郭書)가 먼저 성벽을 오르니 여미(犁彌)가 따라 오면서 ‘그대는 왼쪽으로 오르라. 나는 오른쪽으로 오르겠다. 그리고 모두 오른 다음에 성으로 내려가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곽서가 오른 뒤에 여미가 약속을 어기고 먼저 성으로 내려갔다. …… 제후가 여미에게 상을 주니, 여미가 사양하며 ‘먼저 오른 자가 있는데, 나는 그 뒤를 따랐을 뿐이다. 얼굴이 희고 이가 가지런하며 갖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동곽서를 찾아내고는 ‘바로 그대로구나. 내가 상을 주겠다.’라고 하니, 동곽서가 ‘그는 나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올라갔다.’라고 하며 거절하여 마침내 여미에게 상을 주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