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童丱] 어린아이. 관(丱)은 고대에 어린아이들이 두 갈래로 땋던 머리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 화자유잠시(和子由蠶市)에 “지난날 너와 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해마다 책 읽다 말고 시장으로 달려가 구경했지.[憶昔與子皆童丱, 年年廢書走市觀.]”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관[東觀] 동관(東觀)은 후한(後漢) 때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 있던 대관(臺觀)의 이름으로, 명제(明帝)가 반고(班固) 등에게 명하여 이곳에서 한기(漢記)를 수찬(修撰)하게 하고 책이 이루어지자 동관한기(東觀漢記)라 이름하였다. 이로 인해 후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곳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또, 장제(章帝)와 화제(和帝) 때에 황제의 책을 수집, 정리, 보관하는 황궁(皇宮)의 장서고(藏書庫)로 쓰였는데, 이후 궁중의 장서각(藏書閣)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후한(後漢) 때에는 학사(學士)들을 난대(蘭臺)나 동관(東觀)에 불러서 전적(典籍)을 교감하게 하였는데, 그 직위가 랑(郎)인 자를 교서랑(校書郞)이라고 칭하였다.
동관[東觀] 동관(東觀)은 후한(後漢) 때 낙양(洛陽)의 남궁(南宮) 안에 동관(東觀)이 있었는데, 영초(永初) 연간에 등태후(鄧太后)가 알자(謁者) 유진(劉珍), 유도도(劉騊駼), 마융(馬融) 및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에게 조서를 내려 동관의 오경(五經), 제자(諸子), 전기(傳記), 백가예술(百家藝術)을 교감하여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後漢書 卷5 孝安帝紀, 卷80上 文苑列傳 劉珍>
동관[東關] 관(關)은 지세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구축한 군사상의 요충지를 가리킨다. 동관(東關)은 삼국시대 오(吳)나라 제갈각(諸葛恪)이 세운 관문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여전히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그 터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함서현(含西縣) 서남쪽 유수산(濡須山) 위에 있다.
동관[東關] 함곡관(函谷關)의 이칭이다. 함곡관이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의 동쪽 대문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 고공기(考工記)는 주례(周禮) 동관(冬官)에 해당하는 편명(篇名)으로, 30가지의 수공업에 관한 일들이 설명되어 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焚書)로 산실(散失)된 주관(周官)의 각 편(篇)들을 한(漢)나라 초기에 수집·재편하였는데, 이 때 동관(冬官)편 하나만이 끝내 발견되지 아니하여 부득이 고공기(考工記)로써 이를 보충하였다.
동관[冬官] 공부(工部)를 동관(冬官)이라 한다. 동관(冬官)은 주(周) 나라 때 육관(六官)의 하나로 토목(土木)과 공작(工作) 등의 일을 맡은 관직명인데, 그 일이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적혀 있다. 육부(六部)를 천지(天地)와 사시(四時)로 배열하여, 이부(夷部)는 천관(天官), 공부(工部)는 동관(冬官)이라 칭한다. 공조(工曹). 그러나 그 유래를 살펴보면, 한무제(漢武帝) 때 어느 이씨(李氏) 여인이 주례(周禮)를 얻어 하간헌왕(河間獻王)에게 바쳤는데, 천관(天官)·지관(地官)·춘관(春官)·하관(夏官)·추관(秋官)은 있고 그 가운데 동관(冬官) 1편이 빠졌으므로, 하간헌왕이 천금을 걸고 이를 구했으나 얻지 못하여, 마침내 고공기(考工記)를 취해다가 그 빠진 부분을 대충(代充)하여 도합 6편으로 만들었다.
동관[冬官] 육경(六經)을 천관(天官)은 총재(冢宰), 지관(地官)은 사도(司徒), 춘관(春官)은 종백(宗伯), 하관(夏官)은 사마(司馬), 추관(秋官)은 사구(司寇), 동관(冬官)은 사공(司空)으로 나누었는데, 동관의 사공은 곧 공조(工曹)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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