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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潼關], 동관[童冠]


동관[潼關]  험고한 요새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동관현(潼關縣)에 있는 관(關)의 이름이다. 관중평원(關中平原)의 동쪽, 진령산맥(秦嶺山脈)의 북쪽, 위하(渭河)와 낙하(洛河)의 남쪽, 화산(華山)의 동쪽에 위치하여 산서(山西)와 섬서(陝西), 하남(河南) 세 곳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고, 황하(黃河)의 크게 굴곡(屈曲)하는 데에 있어 군사상의 요해지로 예로부터 쟁탈이 심한 곳이었다. 옛 이름은 도림새(桃林塞)였는데 후한(後漢) 때 관(關)을 설치한 뒤로 동관(潼關)으로 불렸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가까이에 있는 지역으로, 이곳을 병마부원수 가서한(哥舒翰)이 지키고 있다가 안녹산(安祿山)의 군대와 싸워서 대패하자, 그의 수하들이 가서한을 체포하여 적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현종(玄宗)은 장안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르고,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러 양국충(楊國忠)과 양귀비(楊貴妃)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十八史略 唐玄宗> 두보(杜甫)의 시 북정(北征)에 “동관에서는 백만이나 되는 군사가, 어찌 그리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나.[潼關百萬師, 往者散何卒.]”라고 하였다.

동관[潼關]  동관진(潼關鎭). 함경북도 종성부(鍾城府)의 북쪽 18리에 있는 진보(鎭堡)의 이름으로, 육진(六鎭)의 요충지가 된다. 종3품인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영(營)이 있었다. 1605년(선조38)에 여진족이 거짓으로 투항 의사를 밝히며 밤을 틈타 문을 열어주기를 청하자, 첨사 전백옥(全伯玉)이 술에 취해 문을 열고 끌어들인 탓에 동관이 함락되었다.

동관[潼關]  동건(童巾)과 마찬가지로 여진어 ‘tunken’의 한자 표기이다.

동관[童冠]  관동(冠童).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 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冠者] 오륙 명과 사내아이[童子] 육칠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에 노래를 하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고 자신의 포부를 밝히자, 공자가 탄식하며 “나는 점을 허여하노라.[吾與點也]”라고 허여하였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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