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백욕[潼關白鵒] 동관(潼關)은 험고한 요새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동관현(潼關縣)에 있던 관(關)의 이름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동관(潼關)에서 흰 구관조[白鵒]를 황제에게 바치러 가는 것을 보고 자신의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함을 탄식하였다. 한유(韓愈)의 감이조부(感二鳥賦) 병서(幷序)에 “정원 11년 오월 초이튿날, 동쪽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초이렛날 동관을 출발하여 황하 남쪽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는 도성을 막 떠나왔을 때라 시절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새장 안에 흰 까마귀와 흰 구관조를 넣고 길을 가던 사람이 ‘모처를 지키는 관리 아무개가 사자를 보내 천자께 바치게 했다.’고 크게 소리 질렀다. 동서로 오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피하며 감히 똑바로 쳐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슬퍼졌다. 나는 다행히 천하가 태평한 시절에 태어나 선조의 유업을 이을 수 있었고, 창과 방패, 쟁기와 보습, 전쟁터에 나아가 공격하거나 지키거나 논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수고로움을 모른 채 일곱 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이십이 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써왔다. 품행은 도의에 어긋남이 없었고 혼자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해 고금의 일들에 대해 한두 가지 중대한 사건은 기억도 하고 있다. 이부에서 주관하는 관리임용고사에 백여 명이 함께 참가했지만 결국 관리임용을 추천하는 문서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하급관리들과 나란히 조정에 늘어서서 천자의 광명을 우러러보았다. 지금 이 새들은 깃털이 색다르다는 것 한 가지 때문에 도덕이나 지혜를 갖춰 황제를 가까운 곳에서 모시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황제에게 바쳐지는 새가 되어 이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그 때문에 부를 지어 홀로 슬퍼하며 때를 만난 사람은 작은 선행으로도 반드시 뜻을 얻어 영달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선행을 쌓아도 받아들여지지 못함을 밝힌다.[貞元十一年, 五月戊辰, 愈東歸. 癸酉, 自潼關出, 息於河之陰. 時始去京師, 有不遇時之嘆. 見行有籠白烏、白鸐鵒而西者, 號於道曰: 某土之守某官, 使使者進於天子. 東西行者皆避路, 莫敢正目焉. 因竊自悲, 幸生天下無事時, 承先人之遺業, 不識干戈、耒耜、攻守、耕獲之勤, 讀書著文, 自七歲至今, 凡二十二年. 其行已不敢有愧於道, 其閑居思念前古當今之故, 亦僅志其一二大者焉. 選擧於有司, 與百十人偕進退, 曾不得名薦書, 齒下士於朝, 以仰望天子之光明. 今是鳥也, 惟以羽毛之異, 非有道德智謀, 承顧問、贊敎化者, 乃反得蒙采擢薦進, 光耀如此. 故爲賦以自悼, 且明夫遭時者, 雖小善必達, 不遭時者, 累善無所容焉.]”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관병필[東觀秉筆] 동관(東觀)의 기록. 동관(東觀)은 본래 한대(漢代)의 저술 및 장서처(藏書處)이다. 후한(後漢) 초기에는 난대(蘭臺)에서 저술을 하였는데 장제(章帝) 이후로는 국가의 도적(圖籍)을 동관(東觀)에 저장하고 수사관(修史官)들이 모두 이곳에서 역사를 집필하였으므로 역사의 기록을 동관의 기록이라고 한다.
동관부전[彤管不傳] 동관(彤管)은 적색으로 칠을 한 붓을 뜻한다. 충성스러운 마음[赤心]을 기울이라는 의미로, 사관이 기사를 작성할 때 이 붓을 썼다고 한다. 사관의 붓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관비급[東觀秘笈] 동관(東觀)은 후한(後漢) 때 낙양(洛陽)의 남궁(南宮) 안에 있던 대관(臺觀)의 이름인데, 명제(明帝)가 반고(班固) 등에게 명하여 한기(漢記)를 이곳에서 수찬(修撰)하게 하고 책이 완성되자 동관한기(東觀漢記)라고 칭하였는바, 이 일로 인해 국사(國史)를 수찬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 비급(秘笈)은 궁중의 비서(秘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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