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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사[彤管史], 동관서[彤管書], 동관악병[童貫握兵], 동관영귀[童冠詠歸]


동관사[彤管史]  여관(女官)인 동사(彤史)를 가리킨다. 옛날에는 여사(女史)가 적필(赤筆)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왕비의 언행 등을 기록하였다.

동관삼촌이무곽[桐棺三寸而無槨]  오동나무 관을 세 치 두께로 만들고, 외관은 만들지 않음. 곽(槨)은 외관. 내관을 관(棺)이라 하고 외관은 곽(槨)이라 한다. 장자(莊子) 제33편 천하(天下)에 “옛적의 상례(喪禮)는 귀천에 따른 의례가 있었으며, 상하의 사이에 차등이 있었다. 천자는 관(棺)과 곽(槨)을 합쳐 일곱 겹이고 제후는 다섯 겹이고 대부는 세 겹이고 사(士)는 두 겹이었다. 그런데 유독 묵자(墨子)만은 살아서는 노래하지 아니하고 죽어서는 상복(喪服)을 입지 않고, 오동나무 관을 세 치 두께로 만들고, 외관은 만들지 아니하고 그것을 법식으로 삼았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면 아마도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런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행동하면 자기를 사랑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古之喪禮, 貴賤有儀, 上下有等, 天子棺槨七重, 諸侯五重, 大夫三重, 士再重. 墨子獨生不歌, 死不服, 桐棺三寸而無槨, 以為法式. 此教人, 恐不愛人 ; 自行, 固不愛己.]”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관삼촌(桐棺三寸)이 묵자(墨子) 절장 하(節葬下)편에는 관삼촌(棺三寸)이라고 보인다.

동관서[彤管書]  왕후의 모든 행동을 기록한 여사(女史)의 글을 이른다. 여사는 왕후에 대한 적심(赤心)을 상징하는 뜻으로 대롱이 붉은 붓을 썼다고 하는데,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이를 기록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詩經 靜女 註>

동관악병[童貫握兵]  동관(童貫)은 송휘종(宋徽宗) 때 환관이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권을 장악하여 흉노를 치러 하롱(河隴)으로 들어가 고골룡(古骨龍)에 이르러 장수 유법(劉法)을 시켜 삭방(朔方)을 치게 하였으나 패하자, 이를 부끄럽게 여겨 이겼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다. 그 후 군정이 문란해져 금군(禁軍)이 다 도망하였다. <宋史 卷468 童貫傳>

동관여론[東觀餘論]  송(宋)나라 황백사(黃伯思)가 찬(撰)한 책으로 그의 아들 잉(䚮)이 엮어낸 것이다. 고문(古文), 기자(奇字), 종정(鐘鼎), 이기(彝器), 관식(款式) 등을 밝게 변증하고 있다. 총 2권이다.

동관영귀[童冠詠歸]  공자(孔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포부를 말하면서 “늦봄에 봄 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오륙 명과 동자 육칠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쐰 뒤에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고 하자, 공자가 감탄을 하면서 “나는 점을 허여하노라.[吾與點也]”라고 하였던 고사가 있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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