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와해[潼關瓦解] 동관(潼關)은 중국의 관문으로 섬서(陝西), 산서(山西), 하남(河南) 등 세 성(省)의 요충지인데, 안녹산의 반란군이 침략한 곳이다.
동관왕묘[東關王廟] 관우(關羽)를 모신 사당으로 동대문 밖에 있었다. 선조 35년(1602)에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의 명에 의하여 만세덕(萬歲德)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의 장수 관우(關羽)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사당으로, 숭례문 밖 도저동(桃楮洞) 산기슭에 있다가 지금은 서울 동작구 사당동으로 옮긴 것이 남관왕묘이고, 흥인문 밖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것이 동관왕묘이다. 경칩(驚蟄)과 상강(霜降)에 제사 지냈다. 지방으로는 강진(康津), 안동(安東), 성주(星州), 남원(南原)에 관왕묘가 있었다.
동관왕묘[東關王廟] 후한(後漢) 말기의 장수인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동묘(東廟)라 이른다. 1602년(선조35)에 명(明)나라 무신(撫臣) 만세덕(萬歲德)의 명으로 동대문 밖에 세웠는데, 소상(塑像)은 흙을 빚고 금을 칠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전무(殿廡)와 문창(門廠)이 모두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고, 동상(銅像)이라고도 한다. 명나라에서 칙건 현령소덕 관공지묘(勅建顯靈昭德關公之廟)로 사액(賜額)하였다.
동관유서[彤管攸書] 동관(彤管)의 기록. 황후의 모든 행동을 기록한 여사(女史)의 글을 말한다. 여사는 황후에 대한 적심(赤心)을 상징하는 뜻으로 대롱이 붉은 붓[彤管]을 썼다고 하는데, 만약 허물이 있는데도 이를 기록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다고 한다. <詩經 邶風 靜女 註>
동관유위[彤管有煒] 시경(詩經) 패풍(邶風) 정녀(靜女)에 “정숙한 여인이여 아름답기도 한데, 나에게 붉은 붓대 선물하였네, 붉은 붓대가 붉기도 하니, 그대의 아름다움 좋아하노라.[靜女其孌 貽我彤管 彤管有煒 說懌嫸]”라고 하여, 부덕(婦德)을 칭송하였는데, 고대에 후부인(后夫人)은 반드시 여사(女史)를 두어 붉은 붓으로 행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毛詩注疏 卷3>
동관지기[彤管之記] 동관(彤管)의 기록. 훌륭한 여인에 대한 기록을 가리킨다. 동관은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에서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붉은 대통의 붓을 이른다. 후한서(後漢書) 광무 곽황후기(光武郭皇后紀)에 “여사가 동관으로 공을 기록하고 허물을 쓴다.[女史彤管, 記功書過.]”라고 보이는데, 그 주(注)에 “동관은 붓대가 붉은 붓이다.[彤管, 赤管筆也.]”라고 하였다.
동관지사[彤管之史] 붓대가 붉은 붓을 가진 사관(史官). 동관은 옛날 여사(女史)가 궁중(宮中)에서 궁중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할 때 쓰던 붓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곽황후기(光武郭皇后紀)에 “여사가 동관으로 공을 기록하고 허물을 쓴다.[女史彤管, 記功書過.]”고 하였고, 그 주(注)에 “동관은 붓대가 붉은 붓이다.[彤管, 赤管筆也.]”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