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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한기[東觀漢記], 동광업[董光業], 동광천[董廣川], 동광파촉[同光破蜀]


동관한기[東觀漢記]  광무제(光武帝)부터 영제(靈帝)까지 동한의 역사서로, 유진(劉珍) 등이 후한 안제(安帝)의 명에 따라 편찬한 기(紀)·표(表)·명신전(名臣傳)·절사전(節士傳)·유림전(儒林傳)·외척전(外戚傳)을 그 이전에 반고(班固) 등이 명제(明帝)의 명에 따라 편찬한 세조본기(世祖本紀), 뒤에 복무기(伏無忌) 등이 편찬한 표·지·전, 환제(桓帝) 때 변소(邊韶) 등이 편찬한 표·전, 영제(靈帝) 때 채옹(蔡邕) 등이 편찬한 기·전·지와 합편한 것이다.

동관한기[東觀漢紀]  후한(後漢) 명제(明帝) 이후의 잡기(雜記)를 반고(班固)·유진(劉珍)·채옹(蔡邕) 등이 편찬한 책이다. 진(晉) 나라 적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함께 3사(史)라 하고 많이 읽혀졌다 한다. 원래 1백 43권이었으나 지금은 겨우 24권만 전해지고 있다.

동관한서[東觀漢書]  동관한기(東觀漢記)를 가리킨다.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로부터 령제(靈帝)까지의 시대를 기전체(紀傳體)로 기술한 역사서로 후한 명제(明帝)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영제 때 완성하였다. 동관(東觀)은 중국 낙양(洛陽) 남궁(南宮)의 수사관(修史官)이 있었던 건물을 말한다.

동관회[東觀會]  동관의 모임. 동관(東觀)은 원래 후한(後漢) 낙양(洛陽) 남궁(南宮) 안에 있던 대관(臺觀) 이름이다. 명제(明帝)가 반고(班固) 등에게 명하여 이곳에서 한기(漢記)를 편수하도록 하였고, 또 장제(章帝)와 화제(和帝) 때에는 궁중의 책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이로 인해 후에는 국사(國史)를 편찬하는 곳이란 의미로 쓰였다.

동광[同光]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의 연호로 923~926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동광업[董光業]  후당(後唐) 때 동장(董璋)의 아들 동광업(董光業)은 궁원사(宮苑使)로 있었는데, 무건유를 인질로 잡은 동장이 아들 동광업에게 “조정이 나의 손발을 잘라 절(節)과 진(鎭)을 만들어 하노기(夏魯奇)와 이인구 등에게 나누어 주는 등 나를 죽이고 있다. 네가 추밀원을 만나거든 내 말을 전하여 안중회에게 전해지도록 하라. 두 번 다시 나를 압박하면 내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요지의 서찰을 보내었다. 동광업이 이를 추밀원에 가져가 보이고 중재하려 하였으나, 결국 이 이일로 피살되었다. <資治通鑑綱目 卷277 後唐紀 明宗聖德和武欽孝皇帝>

동광천[董廣川]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의 학자인 동중서(董仲舒)로, 광천(廣川)은 그가 살았던 지역 이름이다. 처음에는 강도(江都)의 승(丞)이 되었으나 공손홍(公孫弘)에게 미움을 받아 교서왕(膠西王)의 승(丞)으로 좌천되고, 나중에 벼슬을 그만두고 저술에 힘쓰다가 생을 마쳤다. 춘추(春秋)에 밝아 춘추번로(春秋繁露)를 지었다. 무제에게 상주하여 유교를 국교로 정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광파촉[同光破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同光) 3년(925)에 곽숭도(郭崇韜)와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이 군사를 이끌고 전촉(前蜀)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후당 조정 내부에 분열이 생겨 장종(莊宗)이 시해당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촉(蜀)을 맡았던 동장(董璋)과 맹지상(孟知祥)이 반란을 일으켰고, 맹지상이 다시 동장을 격파하고서 명종에게 겉으로만 칭신(稱臣)한 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명종이 죽자 맹지상은 독립을 선포하고 후촉(後蜀)을 건국하여 고조(高祖)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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