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괵[東虢]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周文王)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괵숙(虢叔) 주 문왕(周文王)의 동생으로 형인 괵중(虢仲)과 함께 주문왕의 경사(卿士)였다. 주 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두 숙부를 괵국(虢國)의 국군(國君)으로 봉하였는데, 괵중(虢仲)은 옹(雍) 땅을 맡아 서괵(西虢)이라고 불렸고, 괵숙(虢叔)은 제(制) 땅에 봉해져 동괵(東虢)이라 불렸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하였다.
동교[東膠] 동교(東膠)는 주나라의 교육기관으로, 태학과 성격이 같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주나라 사람은 국로(國老: 경과 대부로서 치사致仕한 자)를 동교(東膠)인 태학(太學)에서 봉양하고 서로(庶老: 서인으로서 70세 이상의 노인)를 우상(虞庠)인 소학(小學)에서 봉양하였으니, 우상은 국도(國都)의 서교에 있었다.[周人養國老於東膠, 養庶老於虞庠, 虞庠在國之西郊.]”라고 하였다.
동교[東郊] 맡고 있는 지역을 뜻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에 주나라 성왕이 군진에게 “군진아, 너의 훌륭한 덕은 효도와 공손함이로다.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정사에 잘 시행하였으므로, 너를 명하여 이 동교를 다스리게 하노니, 공경하라.[君陳! 惟爾令德孝恭. 惟孝友于兄弟, 克施有政, 命汝尹玆東郊, 敬哉!]”라고 하였다.
동교[東郊] 서울 동대문(東大門) 밖 근처의 지명. 동교에 적전(籍田)이 있어서 평소에는 백성의 힘을 빌려서 경작하다가 수확할 때가 되면 호조 낭관(郞官)이 벼 베는 것을 감독하였다고 한다.
동교[東郊] 한 나라의 도성의 동쪽 교외를 가리킨다. 주대(周代)에 동도(東都)가 있던 왕성의 동쪽 교외를 또 이렇게 불렀다. 한(漢) 나라 소광(疏廣)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갈 때 동대문 밖에서 송별을 하였는데, 그때 전송을 나온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疏廣傳>
동교[東橋] 중국 장안성(長安城)에 있는 파교(灞橋)의 이칭으로, 동쪽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동교별업[東郊別業] 동교(東郊)는 도성의 동쪽 교외를 가리키고, 별업(別業)은 별장 전원의 뜻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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