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나석[董蘿石] 이름은 운(澐), 자는 복종(復宗), 만년의 호는 종오도인(從吾道人)으로 명 나라 해염(海鹽) 사람인데, 시에 능하였다.
동낙서경[東洛西京]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을 가리킨다.
동남[東南] 남송(南宋)의 조정을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1188년에 올린 봉사(封事)에서 남송의 군신(君臣)이 강화(講和)를 주장하며 무사안일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고 “기강이 해이해져 온갖 문제점이 속출하고 있으니, 하찮은 동남의 정국이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국력을 결집하여 국가의 회복을 도모하겠습니까.”라고 한탄하였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동남경[東南傾] 이백(李白)의 시 몽유노모음(夢遊老姥吟)에 “저 팔만사천 길 높이의 천태산도, 이 산을 마주하면 넘어져 동남쪽으로 기울려 하리.[天台八萬四千丈 對此欲倒東南傾]”라고 하였다.
동남구로[東南九路] 북송 때에는 그 영토를 26로(路)로 구분했다. 동남구로는 그 26로 중에서 동남쪽에 있는 9로를 말한 것이다. <宋史 卷85 地理1>
동남누접[童男樓艓] 진시황(秦始皇)이 방사(方士) 서불(徐市)에게 명하여 동남동녀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속으로 들어가서 삼신산(三神山)을 찾아 선약(仙藥)을 구하도록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秦始皇本紀>
동남도[東南道] 동대문 쪽과 남대문 쪽.
동남동녀[童男童女]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진(秦)나라 때 방사(方士) 서복(徐福)이 진 시황(秦始皇)에게 글을 올려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며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동남동녀[童男童女]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안기선생(安期先生)은 낭야(琅琊) 부향(阜鄕) 사람으로 동해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천세옹(千歲翁)이라 하였다. 진 시황(秦始皇)이 동쪽으로 노닐다 만나서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금은보화를 주었으나, 모두 그대로 남겨 두었으며, 한 통의 편지와 한 쌍의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赤玉舃]을 남겨 두었는데 그 편지에 ‘몇 해 뒤 봉래산에서 나를 찾으라.’라고 하였다. 이에 진 시황이 서불(徐巿) 등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수백 명을 데리고 동해에 배를 띄워 봉래산을 찾아가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동남동녀[童男童女] 진 시황(秦始皇) 28년에 제(齊)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닷속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재계하고 동남동녀와 함께 신선을 찾으라고 권하자, 진 시황은 서불에게 어린 남녀 수천 명을 딸려서 삼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 오게 하였다. <史略 卷2 秦> 서불은 해도(海島)에서 임금노릇을 하고 돌아가지 않아서 일본에 그 유적(遺蹟)이 있다고 한다.
동남반[東南班] 동반(東班)·서반(西班) 외에 제3직인 남반(南班)이 있는데, 동반은 문반, 서반은 무반, 남반은 주로 내료직(內僚職)에 속하여 양반의 대열에는 들지 못하고 천시되었다.
동남보[東南寶] 옛날 중국에서 육기(陸機) 형제와 고언선(顧彦先), 우번(虞翻) 등을 칭찬하면서 그 출신지를 지칭하여 각각 동남수(東南秀)니 동남보(東南寶)니 동남지미(東南之美)니 하였다. <世說新語 賞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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