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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수[東南秀], 동남죽전[東南竹箭], 동남지미[東南之美], 동낭리탐[同囊裏探]


동남비[東南轡]  동남쪽으로 말고삐 잡음. 한(漢)나라 범방(范滂)이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안찰사(按察使)로 임명되자,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慨然)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후한서(後漢書) 권67 범방열전(范滂列傳)에 “당시 기주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떼 지어 일어나므로, 이에 조정에서 범방을 청조사로 삼아 그곳을 안찰하게 하자, 범방이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손에 잡고는 개연히 천하를 깨끗이 맑히려는 뜻이 있었다.[時冀州飢荒 盜賊群起 乃以滂爲淸詔使 案察之 滂登車攬轡 慨然有澄淸天下之志]”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고삐를 잡았다[攬轡]는 것은 곧 지방관이 된 것을 뜻한다. 등거남비(登車攬轡).

동남소조정[東南小朝廷]  송 휘종(宋徽宗) 때 재상 채경(蔡京)의 측근인 주면(朱勔)이 권세와 위엄을 부리자 간사하고 비루한 자들이 그의 문전에 기웃거리며 아첨하여 직각(直閣)부터 학사(學士)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를 얻고자 하면 얻을 수 있었고 주면에게 빌붙지 않은 자는 파출당하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남의 작은 조정[東南小朝廷]’이라고 지칭하였다. <宋史 卷470 佞幸列傳 朱勔>

동남수[東南秀]  옛날 중국에서 육기(陸機) 형제와 고언선(顧彦先), 우번(虞翻) 등을 칭찬하면서 그 출신지를 지칭하여 각각 동남수(東南秀)니 동남보(東南寶)니 동남지미(東南之美)니 하였다. <世說新語 賞譽>

동남육로[東南六路]  강회(江淮), 절동(浙東), 절서(浙西), 형호(荊湖) 등 중국 송(宋)나라 때 발운사(發運使)가 관할하는 구역을 가리킨다.

동남죽전[東南竹箭]  죽전(竹箭)은 신우대로 만든 화살이다. 이아(爾雅) 석지(釋地)에 “동남쪽의 아름다운 물산으로는 회계에서 나는 대화살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다.

동남지란[東南之亂]  곧 7국의 난[七國之亂]을 가리킨다. 7국(國)이 동남 지구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한 경제(漢景帝) 때에 조조(鼂錯)의 건의를 채택하여 제후(諸侯)의 봉지(封地)를 삭탈(削奪)하니, 오왕(吳王) 유비(劉濞)는 임금 곁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초(楚)·월(越)·교서(胶西)·교동(胶東)·제남(濟南)·치천(菑川) 등과 연합하여 무장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晁錯)가 반란의 원인 제공자라는 이유로 참형(斬刑)하였으나 반란은 그치지 않자 주아부(周亞夫) 등 장군을 보내 난을 진압하고 오왕(吳王)을 참수하자, 다른 제후왕들은 모두 자살하였다.

동남지미[東南之美]  삼국 시대 위(魏) 나라 공융(孔融)이 우번(虞翻)의 주역(周易) 주해서(注解書)를 보고 칭찬하면서 우번의 고향을 빗대어 “동남 지방 보배가 회계산의 대나무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乃知東南之美者 非徒會稽之竹箭也]”라고 하였다. <吳志 虞翻傳>

동남지미[東南之美]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손님과 주인 동남쪽의 아름다운 인물 다 모였고.[賓主盡東南之美]”라고 한 데서 인용된 말로 주객이 모두 좋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회계의 하생은 몸가짐과 식견이 맑고 고상하며, 언행이 예법에 들어맞아서, 동남지방의 인재일 뿐만 아니라 사실 천하의 수재이다.[會稽賀生, 體識淸遠, 言行以禮; 不徒東南之美, 實爲海內之秀.]”라고 하였다.

동낭리탐[同囊裏探]  물건을 취득하기가 매우 용이함을 말한다. 신오대사(新五代史) 남당세가(南唐世家)에, 남당(南唐)의 후주(後主) 이욱(李煜)이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中國)이 나를 재상(宰相)으로 써 준다면 강남(江南)을 취하는 것은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中國用吾爲相 取江南如探囊中物爾]”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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