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同塗] 같은 무리. 동류(同流). 동도(同徒). 동도(同途). 동대(同隊).
동도[東渡] 동편에 있는 나루.
동도[東道] 좌전(左傳)에, 정(鄭) 나라에서 진(秦) 나라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네의 동도 주인(東道主人)이 되어 주겠다.”고 하였는데 뒤에 주인을 동도(東道)라 한다.
동도[東道] 동도는 동도주(東道主)에서 나온 말이다. 춘추 시대에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합동으로 정(鄭)나라를 포위했을 때, 정백(鄭伯)의 신하 촉지무(燭之武)가 진 목공(秦穆公)을 만나 “만약 정나라를 그대로 놔두어, 진(秦)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할 적에 길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하고, 사신들이 왕래할 적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한다면, 임금님에게도 손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共其乏困 君亦無所害]”라고 설득하여 포위를 풀게 했던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
동도[東都] 경주(慶州)를 말한다. 경주는 고려 시대 삼경(三京)의 하나인 동경(東京)이었기에 후대에도 동도로 불렸다.
동도[東都] 보통 동도(東都)는 낙양(洛陽)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후당(後唐)은 개국(開國)할 때 낙양에 도읍하고 초기에는 업(鄴)을 동경(東京)으로 삼았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동도는 곧 위주(魏州) 업도(鄴都)이다. 이는 구오대사(舊五代史) 장헌열전(張憲列傳)의 기사에 “황제의 차가가 업에 행차하였다.[車駕幸鄴]”라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
동도[東都] 주평왕(周平王)이 도읍을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긴 이후의 명칭이다. 또는 동주(東周)라고도 하나, 이는 무왕(武王)이 죽은 후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위해 낙읍(洛邑)에다 도읍을 정할 때의 이야기이다.
동도[東都]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낙양(洛陽)으로, 후한(後漢)의 광무(光武)가 여기에 도읍(都邑)을 하였으며, 동도(東都)라 불리웠다.
동도리[同道里] 동달이. 보통 조선 시대 무관의 공복(公服)의 일종으로 좁은 소매를 단 도포를 칭하는데, 여기서는 주렴 상단에 가로로 동을 단 것을 말하는 듯하다. 동은 저고리 소매 끝에 이어 대는 천조각을 말한다.
동도문[東都門] 한 선제(漢宣帝) 때 소광(疏廣)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된 지 5년 만에 성만(盛滿)을 경계하는 뜻에서 병을 핑계로 상소하여 사직하고 그의 조카인 태자소부(太子少傅) 소수(疏受)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천자는 황금 20근을, 태자는 50근을 각각 하사하였고, 공경대부(公卿大夫) 친구들은 동도문(東都門) 밖에서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었다. 그들을 배웅 나간 차량(車輛)이 무려 100여 대에 이르렀고, 도로에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그들을 어진 대부라고 칭찬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漢書 卷71 疏廣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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