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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린미색[東隣美色], 동린살우 서린약제[東隣殺牛 西隣禴祭], 동림[洞林], 동림[東林]


동린미색[東隣美色]  동쪽 이웃의 미녀는 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 “동쪽 집의 처자는 1분만 더 보태면 키가 너무 크고, 1분만 감하면 키가 너무 작으며, 분을 바르면 너무 희고, 연지를 찍으면 너무 붉으며, 눈썹은 마치 물총새의 깃 같고, 살결은 마치 하얀 눈빛 같으며, 허리는 흡사 한 묶음 비단 같고, 치아는 흡사 진주를 머금은 것 같아서, 상긋 한번 웃으면 양성과 하채를 미혹시킨다.[東家之子 增之一分則太長 減之一分則太短 著粉則太白 施朱則太赤 眉如翠羽 肌如白雪 腰如束素 齒如含貝 嫣然一笑 惑陽城 迷下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동린살우 서린약제[東隣殺牛 西隣禴祭]  주역(周易) 기제괘(旣濟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동쪽 이웃 마을에서 거창하게 소를 잡아 성대히 제사 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 마을에서 때에 맞추어 검소하게 제사 지내고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東隣殺牛 不如西隣之禴祭 實受其福]”라고 하였다. 성의(誠意)는 없고 단지 성대한 제물만 진설하는 제사가 제물은 간략하지만 성의 있게 지내는 제사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동림[洞林]  동림조담(洞林照膽) 진(晉)의 곽박(郭璞)의 저서라고 한다.

동림[洞林]  풍수학의 책. 동림조담(洞林照膽).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된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 권12 형법류(形法類)에 의하면 오대(五代) 때 사람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풍수지리서라고 한다. 문헌통고에는 서명이 동림별결(洞林別訣)로 되어 있다.

동림[東林]  동림서원(東林書院)의 약칭이다. 송(宋)의 양시(楊時)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다 동림서원을 세워두고 학문을 강론했는데, 당시 사대부들로서 가슴에 경륜을 지니고 세상과 맞지 않은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그때 집권파인 위충현(魏忠賢) 일파로부터 동림당(東林黨)이라는 지목을 받고 숙청까지 당했다가 충현이 복주(伏誅)된 후 다시 번성하였다. <明史 顧憲成傳>

동림[東林]  동림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동림학파(東林學派)를 가리키며, 동림당(東林黨)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말기의 어지러운 정치, 사회적 현실 속에서, 학문은 경세치용(經世致用)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내걸었으며, 정치적으로는 환관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립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반대하는 세력들에 의한 정치적 탄압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즙산학파의 창시자 유종주와 그 제자인 황종희의 부친 황존소(黃尊素)가 모두 동림당의 일원이었다.

동림[東林]  명 신종(明神宗) 때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좌천을 당한 고헌성(顧憲成)·고번룡(高樊龍)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당파인 동림당(東林黨)을 말한다.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근거지로 재야(在野)의 학자나 불평분자를 규합, 시정(時政)을 논한 것이 시초가 되어 끝내는 조정의 관리까지 모여 대정당이 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반대파와의 논쟁으로 명나라가 멸망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동림[東林]  명 신종(明神宗) 때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좌천을 당한 고헌성(顧憲成)이 그의 아우 고윤성(顧允成)과 함께 송(宋)나라 양시(楊時)의 위패를 모신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재건하여 동지인 고반룡(高攀龍) 등과 강학을 하며 재야의 학자들과 시정(時政)을 논하고 인물을 품평하였는데, 동림이란 이들 무리를 가리킨다. 당시 반대편에서 권력을 전횡하던 위충현(魏忠賢)을 위시한 서림(西林)을 배척하다가 당화(黨禍)를 당하였다. <明史 卷231 顧憲成列傳>

동림[東林]  명(明)나라 신종(神宗) 만력(萬曆) 연간에 고헌성(顧憲成) 등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중수(重修)하고 고반룡(高攀龍) 등과 함께 이곳에서 강학(講學)하며 조정의 정사를 비평하며 의논하였는데, 그때 참여했던 사람들과 이에 동조했던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동림서원은 원래 송(宋)나라 양시(楊時)가 강학했던 곳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무석시(無錫市)에 있다. 이 동림학파의 명성이 점점 커지면서 적대 세력에 의해 동림당(東林黨)이라고 지목을 받았는데, 희종(熹宗) 천계(天啓) 연간에 환관(宦官)인 위충현(魏忠賢)이 전권(專權)을 행사하자 동림의 제인(諸人)이 끝까지 항거하다가 모두 혹독한 박해를 받았으며, 그 뒤에 숭정(崇禎)이 즉위하자 위충현이 실세(失勢)하여 자진(自盡)하면서 당금(黨禁)이 비로소 풀렸다. <明史 卷231 顧憲成列傳> <明史紀事本末 東林黨議>

동림[東林]  명대 붕당(朋黨)의 하나인 동림당(東林黨)을 말한다. 신종(神宗) 때 고헌성(顧憲成) 등이 강소성 무석(無錫)에 있는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수리하여 학문을 강론하자, 여러 명사들이 모여들어 동림당이 출현했다. 이들은 공담(空談)을 피하고 현실 정치를 논하여 당시의 정치를 평하고 시폐를 비판했다. 특히 엄당(閹黨)을 공격했으며, 조정의 내감(內監) 일파와 정치 현안에 대해 일대 논쟁을 벌였다. 희종의 천계 5년(1625)에 위충현(魏忠賢) 등이 꺼려하여 당옥(黨獄)을 일으켜 거의 주멸했다. 숭정 초기에 위충현이 복주되자 동림당이 다시 떨쳤지만 환관 잔당들과 서로 보복하여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야 비로소 쟁단(爭端)이 그쳤다.

동림[東林]  동림사(東林寺). 중국 여산(廬山)에 있는 절 이름이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중에 고승(高僧) 혜원법사(惠遠法師)가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있던 환이(桓伊)의 도움으로 여산(廬山) 동쪽에 동림사(東林寺)를 창건했다. 지금도 여산의 고적 중의 하나이다. 이 동림사에서 혜원은 혜영(惠永)·혜지(惠持)·유유민(劉遺民)·뇌차종(雷次宗) 등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불도에 정진했다.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호계(虎溪)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연명(陶淵明)·육수정(陸修靜)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동림[東林]  지금의 중국 강서성(江西省) 여산(廬山)에 있던 사찰 이름이다.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에 혜원법사(慧遠法師)가 강주사마(江州司馬) 환이(桓伊)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였다. 이 동림사(東林寺)에서 혜원(慧遠)은 혜영(惠永)·혜지(惠持)·유유민(劉遺民)·뇌차종(雷次宗) 등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불도에 정진했다. 송(宋)나라 때 태평흥국사(太平興國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도 여산의 고적 중의 하나이다. 참고로 사공서(司空曙)의 시 한원즉사기간공(閒園即事寄暕公)에 “동림사에 몸 하나 맡겨볼까 했더니, 가련한 딸아이 아직 어리네.[欲就東林寄一身, 尙憐兒女未成人.]”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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