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삭[東方朔] 한 무제가 건원(建元) 연간에 상림원(上林苑)을 대대적으로 확장하려 하자, 동방삭이 ‘하늘이 변이를 내리지 않는다면 삼보(三輔)의 땅도 모두 폐하의 동산이 될 것이니, 굳이 확장할 필요가 없으며, 사치하는 것이 일정한 법제를 잃으면 하늘이 변이를 내릴 것이니, 지금의 상림원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신의 생각에는 크다고 여겨진다.’는 내용으로 간언하였다. 이에 무제가 동방삭에게 태중대부(太中大夫) 급사중(給事中)을 제수하고 황금 100근을 하사하였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동방삭[東方朔] 동방삭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관직은 낮았지만 해학(諧謔)과 변설(辯舌), 직언(直言) 등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책들을 좋아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며, 야사·전기와 잡서들까지 박람(博覽)하였다. 또한 시(詩)·서(書)·백가(百家)의 말들을 암송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方朔>
동방삭[東方朔] 자는 만천(曼倩)이고 막힘이 없는 유창한 변설과 재치로 한무제(漢武帝)의 사랑을 받아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시중꾼이 아닌, 무제의 사치를 간언하는 등 근엄한 일면도 있었다. ‘익살의 재사’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을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자조(自嘲)한 문장 객난(客難)과 비유선생지론(非有先生之論)을 비롯하여 약간의 시문을 남겼다. 이미 한나라 때부터 황당무계한 문장을 이 이름으로 가탁(假託)하는 일이 많아 신이경(神異經), 십주기(十洲記) 등의 저자라고 전해지나 모두 진(晉)나라 이후의 위작(僞作)으로 추측된다. 속설에 서왕모(西王母)의 복숭아를 훔쳐 먹어 장수하였다 하여 ‘삼천갑자 동방삭(三千甲子東方朔)’으로 일컬어졌으며 ‘오래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그 뜻이 바뀌어 쓰인다.
동방삭[東方朔]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 해학(諧謔)과 직언(直言)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의하면, 동방삭이 살았을 때에 동사랑(同舍郞)이 말하기를 “천하에 아무도 동방삭을 알 자가 없고, 오직 태왕공(太王公)만이 안다.”라서 하였는데, 동방삭이 죽은 뒤에 무제(武帝)가 그 말을 듣고는 태왕공을 불러 “네가 동방삭을 아느냐?”고 묻자, 태왕공이 천문(天文)으로 알 수 있다고 하므로, 무제가 또 묻기를 “모든 별이 다 갖춰져 있느냐?”하니, 태왕공이 대답하기를 “다른 별들은 그대로 있으나 다만 세성(歲星)은 18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이제야 다시 보입니다.”라 하자, 무제가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동방삭이 살아서 18년 동안을 내 곁에 있었는데, 그가 바로 세성이었음을 내가 몰랐구나.”라고 하였다 하므로, 이것이 곧 동방삭의 전신이 세성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또 참된 은자[大隱]가 되었다는 것은 동방삭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같은 사람은 조정(朝廷) 사이에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이다. 속세에 묻혀 살며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노니, 궁전(宮殿) 안이 곧 세상을 피하여 몸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인데, 하필 깊은 산중을 들어갈 것이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二十六, 李太白集 卷十一 書懷贈南陵常贊府詩>
동방삭[東方朔] 한 무제(漢武帝) 때 낭관(郎官)으로 특히 해학(諧謔)과 변설(辯舌)이 아주 뛰어나서, 특히 천자에게 풍간(諷諫)을 많이 했던 인물로, 한번은 다른 낭관들이 그의 별난 행위를 가리켜 광인(狂人)이라 칭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삭 같은 무리는 이른바 조정 사이에서 세상을 피한 자이다. 옛사람은 깊은 산속에서 세상을 피했느니라.[如朔等 所謂避世於朝廷間者也 古之人 乃避世於深山中]” 하였고, 또 혹 술이 거나할 때면 노래하기를 “속세에 숨어도 지내고, 금마문에서 세상을 피하기도 하네. 궁전 안에서도 세상 피하고 몸 온전히 할 수 있거늘, 왜 굳이 깊은 산속의 띳집을 찾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陸沈於俗 避世金馬門 宮殿中可以避世全身 何必深山之中蒿廬之下]”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하후담(夏侯湛)의 동방삭화찬(東方朔畫贊)에 “대저 총명하고 통달하며 가슴이 탁 트이고, 도량이 매우 광대하여, 재상과 경대부들을 능멸하고, 호걸들을 조롱하여 비웃었다.[夫其明濟開豁 包含弘大 陵轢卿相 嘲哂豪傑]”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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