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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同産], 동산[洞山], 동산[銅山], 동산[東山]


동산 :  마을 부근에 있는 작은 산이나 언덕. 큰 집의 정원에 만들어 놓은 작은 산이나 숲. 행복하고 평화로운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동산[同産]  동복(同腹) 형제. 형제자매.

동산[銅山]  동산은 구리광산으로, 만력제는 여러 곳에 동산을 두고 만력통보를 주조하였다.

동산[銅山]  돈이 풍부한 것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가 일찍이 촉(蜀)의 엄도동산(嚴道銅山)을 영신(佞臣) 등통(鄧通)에게 주어서 임의로 주전(鑄錢)하게 하였다.

동산[洞山]  당(唐) 나라 때 고승 양개선사(良价禪師)이다. 선종(禪宗) 조동종(曹洞宗)을 창시한 사람으로 성은 유씨(兪氏)이다. 만년에 동산(洞山)에 살면서 명성을 떨쳤으므로 산 이름이 별호가 되었다.

동산[東山]  노나라 도성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겼고, 태산(太山)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동산[東山]  동산(東山)은 동진(東晉) 때의 명신인 사안(謝安)이 출사(出仕)하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그가 산천을 유람하면서 기생을 늘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뒤에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침입했을 때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되자 조카 사현(謝玄) 등을 보내어 부견의 100만 대군을 비수(淝水)에서 격파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동산[東山]  동산(東山)은 동진(東晉)의 명신(名臣)으로 일찍이 동산(東山)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그가 40여 세까지 이곳에 은거했던바, 특히 당대에 풍류와 아량이 높기로 유명했고, 매양 자기 내외 자질들과 기녀들을 거느리고 동산의 별장에서 주연을 푸짐하게 베풀고 풍류를 한껏 즐기기도 했었다. <晉書 卷79 謝安傳>

동산[東山]  동산(東山)은 시경(詩經) 빈풍의 편명이다. 일찍이 주 무왕(周武王)이 주(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무경(武庚)을 대신 세운 다음, 자기 아우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은(殷)에 보내서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는데, 무왕이 돌아가고 이린 성왕(成王)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관숙·채숙이 무경에게 붙어 “주공(周公)이 장차 유자(孺子;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그 말을 듣고 숙부인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공이 동쪽으로 정벌하여 무경과 관숙·채숙을 모두 토멸하였는데, 이 동산시는 바로 주공이 무경 등을 토멸하고 3년 만에 돌아와서 병사들을 위로한 노래이다.

동산[東山]  시경(詩經) 빈풍(豳風)의 편명으로, 주공(周公)이 지은 것이다. 주공의 형인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일찍이 무경(武庚)에게 붙어서, 주공을 지목하여 “장차 유자에게 불리할 것이다.[將不利於孺子]”라는 유언비어를 국중(國中)에 퍼뜨림으로써 성왕(成王) 또한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자, 주공이 동산으로 물러가서 3년 동안을 있었는데, 뒤에 성왕이 주공의 <치효(鴟鴞)> 시를 보고 또 뇌풍(雷風)의 변고를 당하고 나서는 크게 회오(悔悟)하여 주공에 대한 의심을 풀고 주공을 맞이하자, 주공은 앞서 이미 동산에 가서 무경과 관숙, 채숙 등을 치고 3년 만에야 돌아와서 이 시를 지어 군사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유자(孺子)는 바로 성왕을 가리킨다.

동산[東山]  동산(東山)은 절강(浙江) 상우현(上虞縣) 동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진(晉)나라의 사안(謝安, 320~385)이 초년에 왕희지(王羲之), 지둔(支遁) 등과 교유하며 이곳에 은거하였으므로 은거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사안의 자는 안석(安石)으로, 경륜과 지략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는데, 동산에 은거하자 당시 사람들이 “안석이 세상에 나오지 않으니, 창생들을 어찌하려는가.”라고 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또 유담(劉惔)이 “안석이 동산에 은거한 뜻은 마땅히 천하의 사람들과 함께 추앙해야 한다.[若安石東山志, 立當與天下共推之.]”라고 말한 바 있다. <世說新語 賞譽>

동산[東山]  동진(東晉)의 명신으로 일찍이 조정의 부름에 전혀 응하지 않고 동산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키는데, 그는 특히 당대에 풍류와 아량이 높기로 유명했으므로, 그가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있을 적에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안석이 나가려고 하지 않으니, 장차 이 창생들을 어찌한단 말인가.[安石不肯出, 將如蒼生何.]”라고 했는데, 과연 뒤에 사안이 40세가 넘어서야 벼슬길에 나가서 정토 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부견(苻堅)의 백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뒤에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르고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해졌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안석(安石)은 사안의 자이다.

동산[董山]  여진족 추장으로서 청 태조 누르하치의 5대조이다. 부족을 이끌고 파저강으로 와서 이만주와 합류하였다. 1467년 조명(朝明)의 합동 공격 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동산[東山]  양장유(楊長孺)의 호로 성재(誠齋) 양만리(楊萬里)의 아들이다. 자는 백대(伯大),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벼슬은 호주 지주(湖州知州)·광동경략(廣東經略)·복건안무사(福建按撫使)를 역임하였다. <宋元學案 卷44 趙張諸儒學案 楊長孺>

동산[東山]  왕유(王維)의 망천장(輞川莊)이 있던 옥산(玉山)을 가리킨다. 남전산(藍田山)이라고도 한다.

동산[東山]  중국 동진(東晉)의 명신(名臣)인 사안(謝安)을 가리킨다. 그가 출사(出仕)하기 전에 40세까지 동산에 은거(隱居)했으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동진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8년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苻堅)이 친히 백만 대군을 지휘하여 동진의 수도(首都)에서 멀지 않은 비수(肥水)까지 쳐들어왔는데, 사안은 동진의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되어 군대를 먼저 보내고 자기는 출발 전날 별장에 나가서 친구와 함께 내기로 별장을 걸고 바둑을 두어 크게 이겼을 만큼 담대하고 도량이 컸다 한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동산[東山]  진(晉)의 태부(太傅) 사안(謝安)이 출사 전 동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가무에 능한 기녀들을 데리고 산수를 유람하며 지낸 곳을 가리킨다. 진서(晉書) 사안열전(謝安列傳)에 “사안이 산수를 지극히 좋아하여 이름난 산수를 찾아 즐길 때마다 노래하고 춤추는 여인들과 동행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간문제가 ‘사안이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다면 반드시 함께 걱정하기도 할 것이니 다시 부르면 응할 것이다.’라고 하였다.[安雖放情丘壑, 然每遊賞, 必以妓女從. 旣累辟不就, 簡文帝時爲相, 曰: 安石旣與人同樂, 必不得不與人同憂, 召之必至]”라고 하였다. 이백(李白)은 등금릉야성서북사안돈(登金陵冶城西北謝安墩)이라는 시에서 “그때 당시 사안의 풍모를 상상하고, 왕희지가 사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네.[想象東山姿, 緬懷右軍言]”라고 하였다.

동산[銅山]  철산(鐵山)의 옛 이름이다.

동산[東山]  호북성(湖北省) 형문현(荊門縣) 동일리(東一里)에 동보산(東保山)이라고 부르는 동산(東山)이 있는데 산 정상에 초망정(楚望亭)이 있고 이곳에 여러 사람이 제영(題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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