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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서경 영종동명[銅山西傾 靈鍾東鳴], 동산서붕 영종동응[銅山西崩 靈鐘東應], 동산선사[洞山禪師]


동산서경 낙종동응[銅山西傾 洛鐘東應]  동산(銅山)이 서방으로 기울어지면 낙종(洛鐘)은 동방에서 반응을 보이는데, 구리가 생산되는 산이 무너지려 하면 신령한 종이 먼저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말이니, 같은 종류끼리는 서로 감응하여 영향을 주게 된다는 의미이다. <世說新語 文學>

동산서경 영종동명[銅山西傾 靈鍾東鳴]  동산(銅山)이 서쪽에서 무너지면 영종(靈鍾)이 동쪽에서 울린다. 한(漢)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종(鍾)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저절로 울면서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銅)은 산(山)에서 나왔으니 자식에 비유할 수 있고, 산은 동을 생산하였으니 어머니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식과 어머니는 서로 감응하니, 산이 무너질까 두려워 종이 먼저 우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흘 뒤에 남군 태수(南郡太守)가 글을 올려 산이 20여 리나 무너졌다고 아뢰었다. <世說新語 文學>

동산서경 영종동명[銅山西傾 靈鍾東鳴]  장경(葬經)에 “동산이 서쪽에서 무너지니 영종이 동쪽에서 울리고, 나무가 산에서 꽃이 피니 밤이 집에서 싹이 튼다.[銅山西傾 靈鍾東鳴 木春於山 栗芽於室]”라고 하였다. 한(漢)나라 말기에 미앙궁(未央宮)의 동종(銅鍾)이 아무런 이유 없이 울었는데, 동방삭(東方朔)이 필시 동산(銅山)이 무너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실제로 동산이 무너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는데, 날짜를 계산해 보니 동종이 울린 날과 동산이 무너진 날이 같았다고 한다. 또 어떤 시골 사람이 밤을 집에 보관해 두었는데, 봄이 와서 밤나무에 꽃이 피자 집안에 보관 중인 밤에도 싹이 났다고 한다. 장경(葬經)에서는 이것을 부모의 기운과 자식의 기운이 상통하는 증거로 제시하면서 부모의 장지(葬地)를 잘 선택하면 부모의 유골(遺骨)에 좋은 기운이 전해져 자손이 발복(發福)하게 된다고 하였다.

동산서붕 영종동응[銅山西崩 靈鐘東應]  구리가 생산되는 산이 서쪽에서 무너짐에 신령스러운 종이 동쪽에서 감응함. 한(漢) 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미앙궁(未央宮) 앞 전각의 종이 까닭 없이 사흘 밤낮 동안 울었는데, 동방삭(東方朔)이 그 까닭을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구리는 산의 아들이고 산은 구리의 어미입니다. 음양(陰陽)의 기류(氣類)로 말하자면 아들과 어미가 서로 감응하게 마련이니, 아마도 산이 무너짐이 있기에 종이 먼저 우는 것일 것입니다. 그 감응이 앞으로 5일 안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3일 만에 남군 태수(南郡太守)가 상서(上書)하니, 가로세로 20리가 되는 산이 무너졌다 하였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동산서붕 영종동응[銅山西崩 靈鐘東應]  동산(銅山) 서편이 무너지자 영종(靈鍾)이 동쪽에서 따라 울림. 한(漢)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종(鍾)이 아무런 이유 없이 저절로 울면서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동(銅)은 산(山)에서 나왔으니 자식에 비유할 수 있고, 산은 동을 생산하였으니 어머니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식과 어머니는 서로 감응하니, 산이 무너질까 두려워 종이 먼저 우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흘 뒤에 남군 태수(南郡太守)가 글을 올려 산이 20여 리나 무너졌다고 아뢰었다. <世說新語 文學>

동산서원[東山書院]  전라도 고창군 성내면 동산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1718년(숙종4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경여(李敬輿)·이민서(李敏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 이관명(李觀命)·이건명(李健命)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721년(경종1)에 ‘동산(東山)’이라고 사액되었다가 1729년(영조5)에 이르러 철액(撤額)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고 유허지만 남아 있다.

동산선사[洞山禪師]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로 조동종(曹洞宗)의 시조로, 시호는 오본대사(悟本大師)이다. 강서성(江西省)의 동산(洞山) 보리원(普利院)에서 지내며 교화에 힘썼다. 제자인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그 선풍(禪風)을 고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름에서 조동종(曹洞宗)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그는 게송에 “간절히 다른 데서 찾지 말라, 초초하여 나와 멀어지리라. 내 이제 홀로 가나니 도처에서 저를 만나리라. 저가 이제 바로 나이고 나는 이제 저가 아니로다. 응당 이처럼 이해하여야 바야흐로 여여에 계합하리라.[切忌從他覓 迢迢與我疏 我今獨自往 處處得逢渠 渠今正是我 我今不是渠 應須恁麽會 方得契如如]”라고 하였다. <傳燈錄 卷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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