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동산양개[洞山良价], 동산영낙생[東山詠洛生], 동산영우[東山零雨]


동산양개[洞山良价]  당대(唐代) 선승(禪僧)이자 조동종(曹洞宗)의 개조로 속성은 유씨(兪氏)이고 회계(會稽)사람이다. 어려서 스승을 따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독송하다가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에 이르렀을 때 손으로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내게는 눈과 코와 혀 등이 있는데 왜 경전에서는 없다고 하는지요?” 그 말에 스승이 깜짝 놀라 아이의 자질을 높이 보고 오설산(五洩山)의 영묵선사(靈黙禪師)를 찾아가 참례하고 머리를 깎였다. 21세 때 숭산(嵩山)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남전보원(南泉普願) 선사를 찾아가 깨달음을 구했고, 또 위산영우(潙山靈祐)를 찾아가 무정설법(無情說法) 공안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위산영우의 안내로 운암담성(雲巖曇晟)을 찾아가 무정설법의 뜻을 물어 살폈으나 역시 시원하게 뚫리는 바가 없었다. 이에 지주(池州)의 노조보운(魯祖寶雲)과 남원도명(南源道明) 등을 찾아가 참례했다. 물을 건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크게 깨친 후에 운암(雲巖)의 법을 이었다. 대중(大中 847~859) 말년에 신풍산(新豊山)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나 오래지 않아 예장(豫章)의 동산보리원(洞山普利院)으로 옮겨 오위군신설(五位君臣說)을 제창하여 문풍을 크게 떨쳤다. 함통(咸通) 10년(869) 삼월 초하루, 머리를 깎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종을 울려 대중에게 작별을 고하니 대중들이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동산이 홀연 눈을 뜨더니 “무릇 출자가란 마음이 사물에 머물지 않아야 바른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사는 것은 힘든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인데 어찌 슬퍼하는가?[夫出家之人, 心不附物, 是眞修行; 勞生息死, 於悲何有.]”라고 말한 뒤 주지에게 우치제(愚癡齊)를 준비하게 했다. 그로부터 여드레째 되는 날, 몸을 씻고 방장에 앉아 입적했다. 세수 63세, 법랍 42세였다. 시호는 오본선사(悟本禪師)였으나 사람들은 동산양개 또는 동산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동산의 법은 운거도응(雲居道膺), 조산본적(曹山本寂), 용아거돈(龍牙居遁), 화엄휴정(華嚴休靜), 청림사건(靑林師虔) 등 제자 26인이 이어받았지만, 특히 본적의 법계를 주류로 보고 스승 동산과 제자 조산 두 사람을 합해 조동종(曹洞宗)이라 불렀다. 저서로는 현중로(玄中路), 풍중음(豊中吟), 보경삼매가(寶鏡三昧歌), 동산어록(洞山語錄)이 있다.

동산영낙생[東山詠洛生]  동산(東山)은 동진(東晉) 때 일찍이 동산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을 가리키고, 낙생영(洛生詠)은 낙하서생(洛下書生)의 음영(吟詠)을 말한다. 낙하서생의 음영은 본디 성조(聲調)가 탁(濁)하였는데, 사안은 본래 비질(鼻疾)이 있어 음영하는 소리가 탁하였으므로, 그 소리가 마치 낙하서생의 성조와 같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동산영락생[東山詠洛生]  본디 ‘동산(東山)이 낙양(洛陽) 서생(書生)의 음조로 노래한다’는 말로, 동진(東晉) 때 동산(東山)에 은거했던 사안(謝安)이 비염(鼻炎) 때문에 목소리가 탁해서, 진중하고 유장한 낙양 서생들의 음조와 유사했음을 뜻한다. 동진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중원(中原)의 전통 있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진중하고 유장한 음조가 성행하였고, 또 당시 사람들이 사안을 좋아한 나머지 그의 음조까지 좋아하여 심지어는 코를 막고 비슷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동산영우[東山零雨]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감회를 읊은 것이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동산은 주공(周公)을 따라 멀리 전쟁터에 나갔던 군사가 고향에 돌아온 심정을 읊은 시인데, 그중에 “내가 동산에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했었는데, 동쪽에서 돌아올 적에 부슬비 자욱이 내렸다네.[我徂東山 慆慆不歸 我來自東 零雨其濛]”라는 구절이 나온다.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