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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랑[東床郞], 동상례[東牀禮], 동상방[東上房], 동상빈객[東床賓客]


동상랑[東床郞]  사위를 말한다. 왕희지(王羲之)가 어려서부터 행실이 뛰어났는데, 치감(郗鑒)이라는 명망가가 왕씨 집안의 자제들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왕씨 집에 가서 사윗감을 찾게 하였는데, 다른 형제들은 모두 의관을 차려 입고 기다리는 데 반해 왕희지만은 배를 드러낸 채 동상(東床) 위에 누워 있었다. 이에 치감이 왕희지를 사위로 삼았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동상례[東牀禮]  혼례를 치른 뒤에 신랑이 신부집에서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로, 동상례(東床禮)라고도 한다. 동상(東床)이란 명칭은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동쪽 평상에서 배를 내놓고 누워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진서(晉書)왕희지전(王羲之傳)에 의하면, 괵감(郄鑒)이 사위감을 고를 때 여러 소년들은 제각기 잘 보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하였으나 왕희지만은 동족 평상에서 배를 내놓고 누워 있으면서 못들은 체하였는데, 결국은 그가 괵감의 사위가 되었다 한다. 다리를 매다는 장난은 곧 고려 말기에 있었던 남침(覽寢)의 유속(遺俗)으로 혼례 치른 다음날 신랑의 친지들이 신부의 집을 찾아가면, 그 집에서는 으레 잔치를 베풀게 되었으니, 그것을 남침이라 한다. 지금 풍속에서는 신랑을 만나면 다리를 매달아 놓고 때리고 무례한 말을 하면서 주식(酒食)을 요구한다. 진(晉) 나라 때에 희부법(戱婦法)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뭇 남자들이 신부를 희롱하며 신을 벗기고 발을 문지르는 일이었으니 참으로 폐속이었다. 그 풍속은 진·송(晉宋) 때에 시작되었다 하는데, 단연록(丹鉛錄)에 자세히 보인다.

동상륜준망[東床掄雋望]  사위가 되었다는 뜻이다. 왕희지(王羲之)가 어려서부터 행실이 뛰어났는데, 극감(郄鑑)이 왕씨 집안의 자제들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서 왕씨 집에 가서 사윗감을 찾게 하였다. 왕씨 집안의 형제들이 극씨 집안에서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단정하게 차려입고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직 왕희지만은 배를 드러낸 채 동상(東床) 위에 누워 있으면서 신색(神色)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윗감을 고르기 위해 왔던 사람이 돌아가서 극감에게 그런 말을 하자, 극감이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사윗감이다.”라 하고는 딸을 시집보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동상방[東上房]  남향대청(南向大廳)의 왼편에 안방이 있도록 만든 집이다.

동상빈[東床賓]  왕희지(王羲之)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극감(郄鑒)이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왕도(王導)의 문하에서 사윗감을 간택하게 하였더니, 왕씨 문중의 여러 소년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자신을 칭양하였으나, 왕희지만은 배를 드러내고 동상(東床)에 누워 모른 체하자, 그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동상빈객[東床賓客]  동상(東床)의 빈객. 사위를 말한다. 진서(晉書) 권80 왕희지열전(王羲之列傳)에 “태위 치감이 문생을 시켜 왕도의 집안에서 사위를 구하도록 했다. 왕도는 동상에 가서 자제들을 두루 살펴보게 했다. 문생이 돌아와서 치감에게 말하기를 ‘왕씨의 여러 청년들이 모두 훌륭합니다. 그런데 소식을 듣고 모두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는데, 다만 오직 한 사람만이 동상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식사하며 마치 듣지 못한 듯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치감이 ‘바로 이 사람이 좋은 사위감이다!’라고 하였다. 그곳을 방문해 보니 곧 왕희지였다. 마침내 그를 사위로 삼았다.[太尉郗鑒使門生求女婿於導 導令就東廂遍觀子弟 門生歸 謂鑒曰 王氏諸少竝佳 然聞信至 咸自矜持 惟一人在東床坦腹食 獨若不聞 鑒曰 正此佳婿邪 訪之 乃羲之也 遂以女妻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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