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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제[同生弟], 동생지풍[董生之風], 동생하유[董生下帷], 동생행[董生行]


동생제[同生弟]  동모제(同母弟)를 이른다.

동생지풍[董生之風]  동생(董生)의 풍도. 동생은 중국 당(唐)나라의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동소남의 모습을 그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한유가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이라는 고시를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엔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를 않으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물에 가서 고기도 잡네. 주방에는 맛난 음식 갖춰져 있고, 대청에선 평안한지 물어본다네. 부모님은 근심을 아니 하시고, 처자식은 탄식을 아니 한다네.[嗟哉董生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戚戚,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 <韓愈集 卷2 古詩>

동생청생사생[童生靑生社生]  명사(明史) 선거지(選擧志)와 청사(淸史) 선거지에 의하면, 중앙 학교인 국학(國學 국자감(國子監)임)과 지방 학교인 부·주·현학(府州縣學) 두 가지가 있었다. 지방 학교 학생[生員]의 경우는 국학에 들어가야 벼슬할 수가 있었다. 국학에 들어간 학생은 감생(監生)이라 하는데, 매년 뽑혀 갔으니, 이것을 세공(歲貢)이라 했다. 학생의 종류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명대(明代) 초기에는 각 학교의 학생 수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더니, 얼마 후에는 정원 외에 증원[增廣]을 마구 하였다. 그러다가 선덕(宣德: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 연간에 와서는 증원의 수도 정하는 동시에 학생들에게 늠료(廩料)를 지급하였으니, 이를 늠선생원(廩膳生員)이라 하고, 증원된 학생은 증광생원(增廣生員)이라 하였으며, 인재가 많아짐에 따라 정원 외에 더 뽑아 말석에서 청강하게 하였으니 이를 부학생원(附學生員)이라 하였다. 처음 입학한 부학생원을 제외한 이들 학생은 모두 국학에 뽑아 올리는 세공의 대상이 되었다. 이밖에 아직 입학하지 못한 사자(士子)들은 통틀어 동생(童生)이라 하였는데, 향시(鄕試)가 실시되는 해에 이들 중에서 한두 명의 우수한 자를 뽑아 여러 학생들과 함께 시장(試場)에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를 충장유생(充場儒生)이라 하였다. 이들은 이 시장에서 합격할 경우 곧 거인(擧人)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합격하지 못할 경우는 제학관(提學官)이 실시하는 시험이 있을 때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그래서 그 시험에 합격하면 입학자격을 얻게 되었다. 제학관은 재임 3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여러 학생들의 학업 성적을 고시하는데 6등급으로 그들의 우열을 정하였으니, 이를 세고(歲考)라 하였다. 그들의 성적을 고시한 결과 1등일 경우는 늠선생원이 궐원될 때 그로 충원하고 그 다음은 증광생원에 보충하였으며, 5등일 경우에는 늠선생원과 증광생원은 한 등급씩 강등시키고 부학생원은 청의(靑衣 조례(皁隷)의 옷을 입혔기 때문에 청의라 한다.)로 삼고, 6등일 경우는 학생에서 내쫓았다. <明史 選擧志> 청의의 경우는 사(社: 사학社學임)로 내보냈으니 이를 사생(社生)이라 한다. 사학에서도 성적이 여전히 낮을 경우는 평민으로 내쳤다. 청대(淸代)에는 사학(社學)과 의학(義學)이란 것이 있었으니, 사학은 각 향(鄕)에 세워 학문과 품행이 우수한 자를 뽑아 사사(社師)로 삼고 12세 이상인 그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의학은 성(省)·부(府)·주(州)·현(縣)에 세워서 빈한한 집 자제들을 가르쳤다. <淸史 選擧志>

동생하유[董生下帷]  한(漢)나라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경제(景帝) 때에 박사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학문에 열중하여 “휘장을 내리고 강송하며 3년간을 뜰을 엿보지 않았다.[下帷講誦, 三年不窺園.]”고 하였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동생행[董生行]  동생행(董生行)은 당나라 한유(韓愈)가 당시 안풍현(安豐縣)에 사는 동소남(董召南)의 사정을 시로 읊은 것이다. 그가 은거해서 부모를 봉양하며 의(義)를 행하고 있는데, 당시 자사(刺史)가 그의 현행(賢行)을 천자(天子)에게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록(爵祿)은 그에게 오지 않고 날마다 관리가 문 밖에 와서 조세만을 독촉하였다는 내용이다. <小學 善行>

동생행[董生行]  한유(韓愈)가 지은 소학(小學) 선행편(善行篇)의 장명(章名)으로, “당 덕종(唐德宗) 때 동소(董召)가 안풍현(安豊縣)에서 주경 야독하면서 부모에 효도하며 처자에게 자애하여 집 안의 가축들까지도 그의 덕화(德化)를 입어 서로 보호해주었다.”며 그의 은거(隱居)하면서 행의(行義)한 것이 세상에 짝할 자 없음을 찬미하고 당시의 풍속이 퇴폐해짐을 차탄하였다.

동생행[董生行]  한유(韓愈)가 지은 오언 고시(五言古詩) 작품으로, 당나라 은사인 동소남(董邵南)이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읊었다. 그 가사에 “아아, 동생(董生)이여! 아침에는 밖에 나가 밭을 갈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고인의 서책을 읽도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산에서 나무 하고 물에서 고기 잡아, 부엌에 들어가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고 당(堂)에 올라가 부모님께 안부를 물으니, 부모는 근심하지 않고 처자식은 원망하지 않도다.[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동생행[董生行]  한유(韓愈)의 시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을 말한다. 동생(董生)은 당(唐)나라 사람으로 안풍(安豐)에 은거한 고사(高士) 동소남(董召南)이다.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서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니, 그의 벗 한유가 이 시를 지어서 그를 칭찬하였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 전문은 다음과 같다. <嗟哉董生行> 淮水出桐栢山 東馳遥遥千里不能休 淝水出其側 不能千里百里入淮流 夀州屬縣有 安豐 唐貞元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 刺史不能薦 天子不聞名聲 爵禄不及門 門外惟有吏 日來 徵租更索錢 嗟㦲 董生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或水而漁 入㕑具甘㫖 上堂問起居 父 母不慼慼 妻子不咨咨 嗟哉 董生孝且慈 人不識 惟有天翁知 生祥下瑞無時期 家有狗乳出求食 鷄來哺 其兒 喙喙庭中拾蟲蟻 哺之不食 鳴聲悲徬徨 躑躅久不去 以翼來覆待狗歸 嗟哉 董生誰將與儔 時之人 夫妻相虐 兄弟為讐 食君之禄 而令父母愁 亦獨何心 嗟哉 董生無與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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