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종야청[同安鍾夜聽] 송나라 때 주희(朱熹)가 동안현(同安縣)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 밤에 산사에서 종소리를 들은 일에 대해 말하기를 “오늘날 학자들이 큰 진전이 없는 것은 단지 마음이 보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젊을 때 동안에 있을 때 밤에 종소리를 들었는데 한 소리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마음이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깨닫고 반성했으니, 이에 학문을 하려면 모름지기 전념해야 함을 알았다.[今日學者不長進 只是心不在焉 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聲 聽其一聲未絶 此心已自走作 因是警省 乃知學爲須是致志]”라고 하였다. <心經 卷3>
동안청종[同安聽鐘] 주자(朱子)가 스스로 말하기를 “오늘날 배우는 이들이 장족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학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소년 시절 동안(同安)에 있을 때 밤에 종고(鍾鼓) 소리를 들었는데, 그 울리는 소리가 미처 끊어지기도 전에 이 마음에 이미 딴 생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마침내 학문은 모름지기 전심치지(專心致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今日學者不長進, 只是心不在焉. 嘗記少年時在同安, 夜聞鍾鼓聲, 聽其一聲未絶, 而此心已自走作. 因此警懼, 乃知爲學須是專心致志.]”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104 自論爲學工夫>
동안풍[董安豐] 당(唐)나라 중기의 은사인 동소남(董召南)을 가리키는데, 동소남이 안풍현(安豐縣) 사람이라 이렇게 칭한 것이다. 동소남은 일찍이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뜻을 얻지 못했으며, 특히 효성스럽기로 이름났었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2 고시(古詩)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에 “아, 동생(董生)이여,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고인(古人)의 글을 읽도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물에 가서 고기도 잡으며, 부엌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당(堂)에 올라가서 부모(父母)에게 문안(問安)을 드리니, 부모는 근심하지 않고, 처자(妻子)는 탄식하지 않네. …… [嗟哉董生 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慼慼 妻子不咨咨 ……]”라고 하였다. 한유(韓愈)가 지은 동생행(董生行)은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실려 있다.
동안현[同安縣]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한 현이다. 주자가 일찍이 이곳의 주부(主簿)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자제를 뽑아 날마다 성현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강설하고 여자들이 승려(僧侶)나 도사(道士)가 되는 것을 금하면서 교화를 폈다. <宋史 卷429 朱熹傳>
동안현[同安縣] 동안현(同安縣)은 송(宋)나라 때 천주(泉州)에 딸린 고을 이름이다. 주희(朱熹)가 동안현 주부(同安縣主簿)로 재직하던 24세 때의 어느 날, 밤에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있다가 한 번 울리는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다른 데로 달려가곤 하는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오로지 한 군데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朱子語類 卷104 自論爲學工夫>
동안현리종성단[同安縣裏鐘聲斷] 주자(朱子)의 제자 장현보(張顯父)가 주자에게 올린 편지에 “선생께서 ‘지난번 동안현(同安縣)에서 종소리를 들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음 거둬들이는 법을 깨달았다.’고 하시셨습니다. ……”라고 한 데에 대하여, 주자의 답서에 이르기를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종소리 하나가 쉬지 않음으로써 내 마음도 이미 수없이 변하던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朱子大全 卷五十八>
동알안우[董閼安于] 동안우(董安于). 조(趙)나라 양자(襄子)의 아버지인 간자(簡子) 조앙(趙鞅)의 재신(才臣)이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13년에 동안우(董安于)로 되어 있다.
동알우[董閼宇] 동안우(董安于). 조간자(趙簡子)의 가신(家臣)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30·40년과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에는 ‘閼(알)’을 ‘安(안)’으로 썼는데 고음(古音)에 통용이었다고 한다. 조간자(趙簡子)를 위하여 진양(晉陽)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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