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암[東庵]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있는 암자이다.
동애[童騃] 어리고 무지하다. 나이가 어려서 아는 것이 없다. 생각이나 행동이 어리석은 것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시 사자연(謝自然)에 “과주 남충현의 한녀 사자연은 어리고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는데, 듣자니 신선이 되었다네.[果州南充縣, 寒女謝自然, 童騃無所識, 但聞有神仙.]”라고 하였다.
동액[東掖] 당(唐)나라 때 왕명의 출납과 국가의 문서를 관장하던 문하성(門下省)의 별칭으로, 조선(朝鮮)의 경우 승정원(承政院)이 이에 해당한다.
동액문[東掖門] 대성(臺城) 단문(端門) 우측의 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166 호삼성(胡三省) 주(注)에 “대성(臺城) 정남의 단문(端門) 좌우에 있는 두 문을 일컬어 동액문(東掖門), 서액문(西掖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동액원[東掖垣] 문하성(門下省)을 지칭한다. 당나라 때 문하성은 중서성(中書省)과 더불어 각기 황궁(皇宮)의 동서 양쪽에 있었으므로 사람의 겨드랑이와 같다는 의미에서 동액원(東掖垣), 서액원(西掖垣)이라 불렀다.
동액작무[銅額作霧] 전설상의 인물인 치우(蚩尤)의 이마가 구리와 쇠로 되어 있었으며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가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를 제압한 뒤에, 구려족(九黎族)의 우두머리인 치우가 쇠로 병기를 만들어 탁록(涿鹿)의 들에서 헌원씨와 싸웠다. 치우가 짙은 안개를 일으키자 헌원씨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헌원씨가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길을 분간하게 되자 치우는 패하여 잡혀 죽었다고 한다. <史略 卷1 黃帝軒轅> <史記正義 卷1 五帝本紀第一>
동야[東野] 당(唐)나라 호주(湖州) 무강(武康) 사람 맹교(孟郊)의 자이다. 그가 젊었을 때 숭산(嵩山)에 은거하면서 한유(韓愈)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시작에 몰두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시를 지었다. 정원(貞元) 1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율양 위(溧陽尉)가 되었는데, 항상 시를 읊조리다가 공무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현존한 맹교의 시는 400여 수로 악부고시(樂府古詩)가 많은데, 대체로 가난의 고난을 하소연하되 감정이 진지하여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들이다. 소식(蘇軾)의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 “맹교의 시격은 청한하고, 가도의 시격은 수척하다.[郊寒島瘦]”라고 평가되어 있는 것처럼, 빈한하고 불우한 본인들의 삶의 풍경을 시에 그대로 담아낸 것이 특징적이다. 가도(賈島)는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시어의 조탁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야[東野] 동야(東野)는 당(唐) 나라 때의 시인 맹교(孟郊)의 자로, 호주(湖州) 무강(武康) 사람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12년(796)에 진사에 합격하고 율양위(溧陽尉)가 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맹교는 오언시가 뛰어났는데, 한유(韓愈)와 절친했고, 장적(張籍)이 그에게 정요선생(貞曜先生)이란 이름을 주었다. 그는 연해 세 아들을 낳았으나 낳을 때마다 수일 만에 잃었으므로, 한유(韓愈)가 그를 위로하는 뜻에서 지은 맹동야실자시(孟東野失子詩)에 “하늘에게 묻기를 인간을 주관하되 후박을 왜 안 고르게 하는가 하니, 하늘이 이르되 하늘과 땅과 사람은 본래부터 상관이 없다 하였네.[問天主下人 薄厚胡不均 天曰天地人 由來不相關]”라고 하였다. <漢書 卷八十七·韓昌黎集 卷四> 그가 죽은 아들을 애도하여 지은 도망(悼亡)이란 시가 있다. 가도(賈島)와 이름을 나란히 해서 교도(郊島)라 불렸다.
동야[東冶] 지명.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福州市) 민후현(閩侯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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