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董養] 진(晉)나라 때의 절사(節士)로, 자는 중도(仲道)이다. 태시(泰始) 초년에 양후(楊后)가 폐하기에 이르러 태학당(太學堂)에 올라 국가에서 모반의 대역을 사면하는 것을 탄식하고 무화론(無化論)을 지어 그르다고 하였다. <晉書卷94 隱逸列傳 董養>
동양[董養] 진(晋)나라 태학생(太學生)으로 혜제(惠帝) 때에 가후(賈后)가 양준(楊駿)을 죽이고 태후를 폐위하자, 이를 듣고는 “하늘과 사람의 도리가 무너졌으니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탄식하며 그의 아내와 함께 촉(蜀)나라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晉書 卷94 隱逸列傳 董養>
동양[東陽] 동양 태수(東陽太守)를 지낸 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태수로 나간 지 1백여 일 만에 허리띠를 몇 번이나 다시 졸라맬 정도로[革帶常應移孔] 몸이 수척해졌다고 한다. <梁書 沈約傳>
동양[東陽] 동양(東陽)은 황해도 평산군의 옛 이름이다. 평산이 관향인 신씨는 고려 초기 신숭겸(申崇謙)이 태조 왕건(王建)을 위해 죽어서 충절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 후 고관대작이 이어졌다.
동양[東陽] 송나라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이 있던 곳이다. 주자(朱子)의 근사록서제(近思錄書題)에 이르기를 “순희(淳熙) 을미년 여름에 동래(東萊) 여백공(呂伯恭)이 동양으로부터 와서 한천정사(寒泉精舍)로 나를 방문하여 열흘 동안 머물면서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의 책을 읽었다.”라고 하였다.
동양[東陽] 중국 절강성의 지명으로 허겸(許謙)이 이곳의 팔화산(八華山)에서 40년 동안 강학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동양[東陽] 원(元)나라 금화(金華) 사람 허겸(許謙)으로, 동양(東陽)에서 강학하였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자는 익지(益之), 호가 동양이다. 별호는 백운산인(白雲山人)이다. 송말원초의 경학가로, 금릉 강학(金陵講學)을 지냈다. 정주학(程朱學)을 전파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김이상(金履祥)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벼슬하지 않고 동양 팔화산(八華山)에서 기거하였다. 저서에 독서전총설(讀書傳總說), 시명물초(詩名物鈔), 백운집(白雲集)이 있다.
동양[東陽]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영토로,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청하현(淸河縣) 지역이다.
동양[東陽] 지명. 춘추시대 노(魯)나라 땅(현재의 산동山東 비현費縣 부근)이었다. 좌전(左傳) 애공팔년(哀公八年)에 “오나라 군대가 공격을 시작한 뒤 계속 나아가 오오에 주둔하고 다음날은 잠실에 주둔하였다.[吳師克東陽而進, 舍於五梧, 明日, 舍於蠶室.]”라고 하였다.
동양[東瀼] 중국 기주(蘷州)에 있는 물이름으로, 당 나라 두보(杜甫)가 그곳에 부쳐살았다 하여 타향의 뜻으로 쓰인다.
동양대공이[東陽帶孔移] 동양(東陽)은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지낸 남조 양(南朝梁)의 시인 심약(沈約)을 가리킨다. 심약(沈約)의 자는 휴문(休文)이다. 송(宋), 제(齊), 양(梁) 삼조(三朝)에 걸쳐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고, 시문이 당대에 으뜸이었다.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서면(徐勉)에게 준 편지에 “두어 달 동안에 허리둘레는 줄어 허리띠의 구멍을 늘 옮기게 되고, 손으로 팔목을 쥐어 보면 한 달에 평균 반 푼씩 줄어드니, 이런 추세로 볼 때 어찌 오래 지탱할 수 있겠는가.[百日數旬 革帶常應移孔 以手握臂 率計月小半分 以此推算 豈能支久]”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梁書 卷13 沈約列傳> 소식(蘇軾)의 차운왕공안부동범주(次韻王鞏顔復同泛舟) 시에 심약을 일러 “심랑은 청수하여 옷도 감당하지 못했는데, 변로는 똥똥한 배에 허리띠가 십위였다네.[沈郞淸瘦不勝衣 邊老便便帶十圍]”라고 한 시구가 있다. <蘇東坡詩集 卷17> 변로(邊老)는 변소(邊韶)를 가리킨다. 변소는 후한 때 문인으로 자는 효선(孝先)인데, 그가 수백 인의 문도를 교수(敎授)할 적에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한 제자가 선생을 조롱하여 “변효선은 배가 똥똥하여 글 읽기는 싫어하고 잠만 자려고 한다.[邊孝先 腹便便 懶讀書 但欲眠]”라고 하자, 변소가 그 말을 듣고 즉시 대꾸하기를 “똥똥한 내 배는 오경의 상자이고, 잠만 자려고 하는 것은 경을 생각하기 위함이다.[腹便便 五經笥 但欲眠 思經事]”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배가 똥똥하다는 것은 흔히 경학(經學)에 밝음을 의미하는 뜻으로 쓰인다. <後漢書 卷80 文苑列傳 邊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