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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전각[童子篆刻], 동자행석읍[董子行石邑], 동자하유[董子下帷], 동자하지[童子何知]


동자전각[童子篆刻]  전각(篆刻)은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2 오자(吾子)에, “동자(童子)의 조충전각과 같은 일을……장부는 하지 않는다.[童子雕蟲篆刻……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동자지절[童子之節]  예기(禮記) 옥조(玉藻)의 경문에 “동자의 의절(儀節)은 검은 베옷에 비단으로 가선을 두르고 신(紳)과 아울러 유(紐)를 비단으로 만들며 비단으로 머리털을 묶으니, 모두 붉은색 비단이다.[童子之節也, 緇布衣錦緣, 錦紳幷紐, 錦束髮, 皆朱錦也.]”를 가리킨다.

동자행석읍[董子行石邑]  동알우(董閼于)가 조(趙)나라 상지(上地)의 태수가 되어 석읍(石邑) 산중을 순시하고 있었는데, 깊이가 백 길이나 되는 깊은 골짜기를 보고 고을 사람들에게 여기에 빠져죽은 자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고을 사람들이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물들도 빠진 경우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에 동알우가 말하기를 “내가 법을 용서하는 일이 없이 시행하여 마치 이러한 골짜기에 빠지면 틀림없이 죽게 된다는 것과 같이 한다면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使吾法之無赦, 猶入澗之必死也, 則人莫之敢犯也, 何爲不治?]”라고 하였다. <韓非子 內儲說>

동자충명[桐子蟲鳴]  양웅(揚雄)의 법언(法言)에 “스승이여, 스승이여. 동자의 운명이로다.[師哉師哉桐子之命也]”라는 말이 있는데, 그 주(註)에 ‘동(桐)’은 ‘동(侗)’이라고 하였다. 동(侗)은 무지(無知)이고, 충명(蟲鳴)은 벌레 울음으로 무지한 말을 비유한 것이다.

동자하유[董子下帷]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가 장막을 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뜰을 나오지 않았던 데서 유래하였으니,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 “장막을 내리고 강송하니 제자들이 오래도록 수업을 받았으나,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 대개 3년 동안 동산을 엿보지 않았으니, 그 정밀하기가 이와 같았다.[下帷講誦, 弟子傳以久次相授業, 或莫見其面, 蓋三年不窺園, 其精如此.]”라고 하였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동자하유[董子下帷]  동중서(董仲舒)가 일찍이 장막을 내리고 학문에 열중하여 3년이 되도록 동산을 엿보지 않았다고 한다. 사기(史記) 권121 유림열전(儒林列傳) 동중서전(董仲舒傳)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였던 동중서(董仲舒)가 휘장을 내리고 강학(講學)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수업하면서도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이가 있었다. 대개 3년 동안 동산도 보지 않고서 이처럼 학문에 정진하였고, 진퇴와 용지는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 학사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존숭하였다.[董仲舒, 孝景時, 為博士, 下帷講誦, 弟子傳以久次相授業, 或莫見其面. 葢三年不窺園, 其精如此. 進退容止, 非禮不行, 學士皆師尊之.]”라고 하였다.

동자하지[童子何知]  어린 것이 무엇을 아느냐고 꾸짖는 말이다. 당(唐)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어린 제가 무엇을 알아서 이 훌륭한 잔치를 만났겠습니까.[童子何知 躬逢勝餞]”라고 한 데서 보인다.

동자학사[童子學士]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지은 남조 양(梁) 종름(宗懍)의 어렸을 때의 별명이다. 그가 어려서 총민(聰敏)하고 호학(好學)하여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향리에서 동자학사(童子學士)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양서(梁書) 권41 왕규열전(王規列傳) 종름(宗懍)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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