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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예의위의지칙[動作禮義威儀之則], 동작와연[銅雀瓦硯],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


동작연[銅雀硯]  중국 삼국 시대 위(魏)나라 동작대(銅雀臺)의 유지(遺址)에서 발굴된 기와로 만든 벼루이다. 이후에는 벼루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쓰였다. 동작대는 조조(曹操)가 건안(建安) 15년(210)에 세운 전각이다. 큰 공작(孔雀)을 청동으로 주조하여 지붕에 세웠다고 하며, 흑연(黑鉛)에 호두 기름을 섞어서 기와를 구워 만들었다고 전한다. <春渚紀聞 銅雀臺瓦>

동작예의위의지칙[動作禮義威儀之則]  동작(動作)은 행동, 예의(禮義)는 예의, 위의(威儀)는 상하귀천(上下貴賤)의 신분에 맞는 몸가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성공(成公) 13년에 성숙공(成肅公)이 제사에서 제육을 받는 데 공손치 않으니, 유강공(劉康公)이 말하기를 “사람은 천지의 이치를 받아서 태어나니, 이른바 명이다. 그러므로 동작, 예의, 위의의 법칙이 있어 그것으로 명을 안정시킨다. 잘하는 자는 수양하여 복을 받고, 잘하지 못하는 자는 패하여 화를 받는다.[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 以定命也 能者養之以福 不能者敗以取禍]”라고 하였다.

동작와[銅雀瓦]  후한(後漢)의 조조(曹操)가 세운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로 만든 벼루로, 상품(上品)으로 알려졌다.

동작와연[銅雀瓦硯]  중국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가 지은 동작대(銅雀臺)의 기와로 만든 벼루. 위무제(魏武帝) 조조(曹操)가 고도(故都)인 상주(相州)에 동작대(銅雀臺)를 세울 적에, 흑연(黑鉛)에 호도(胡桃) 기름을 섞어서 기와를 구워 만들었다고 하는데, 후대에 그 기왓장을 벼루의 재료로 썼다는 기록이 전한다. <春渚紀聞 銅雀臺瓦>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  두목(杜牧)의 시 적벽(赤壁)에 “부러진 창 모래에 묻혔지만 쇠는 녹지 않아,혼자 그것을 갈고 씻어 前朝의 유물인 줄 알았네. 동풍이 주랑(周郞)의 편을 들지 않았더라면, 봄 깊은 동작대(銅雀臺)에 이교(二喬)가 갇혔으리라.[折戟沈沙鐵未銷, 自將(磨洗認前朝. 東風不與周郞便, 銅雀春深鎖二喬.]”라고 한 데서 보이는 구절이다. 동작(銅雀)은 대(臺)의 이름이다. 옛터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임장현(臨漳縣) 서남쪽 업성(鄴城) 안에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무제기(武帝紀)에 “건안 15년에 동작대를 지었다.[建安十五年作銅雀臺]”라 되어 있다. 누대의 꼭대기에 큰 동작(銅雀)이 하나 있어서 이 같은 이름을 얻었는데, 조조가 만년에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 이교(二喬)는 동한(東漢) 때 교현(喬玄)의 두 딸을 가리키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孫策)이 대교(大喬)를 아내로 삼고 주유(周瑜)가 소교(小喬)를 아내로 삼았는데, 세상에서 이 둘을 이교(二喬)라고 불렀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주유전(周瑜傳)에 “교공(喬公)의 두 딸은 모두 나라에서 이름난 미인(美人)이었다. 손책(孫策)이 스스로 대교(大喬)를 맞이하였고, 주유(周瑜)는 소교(小喬)를 맞이하였다.[喬公二女 皆國色也 孫策自納大喬 瑜納小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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