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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잠[同岑], 동잠실[東蠶室], 동장[董璋], 동장[銅章], 동장[銅掌], 동장[東墻]


동잠[同岑]  동잠은 취향이 같은 벗을 일컫는 말이다. 곽박(郭璞)의 ‘온교에게 주다[贈溫喬]’라는 시에 “그대와 나의 냄새와 맛은, 이끼는 다르지만 산은 같은 격이네.[及爾臭味, 異苔同岑.]”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古詩紀 卷41>

동잠실[東蠶室]  양주의 아차산 밑에 있는데 환관이 관장하였다.

동장[董璋]  어릴 때 변주(汴州)의 상인(商人)인 이칠랑(李七郞)의 하인으로 말똥 청소하는 일을 하다가 이칠랑이 후량 태조(後梁太祖) 주전충(朱全忠)의 양자(養子)가 되자 주전충을 섬겨 택주자사(澤州刺史)에 이르렀다. 후에 후당(後唐)에 투항하여 후촉(後蜀)을 정벌할 때 공을 세우고 검남동천절도사(劍南東川節度使)가 되었다. 후당 명종이 즉위하여 제천(祭天)을 위한 공미(貢米)를 걷으려고 사신 이인구(李仁矩)를 보내었는데, 이인구의 무례로 둘 사이가 크게 틀어졌다. 이인구가 조정에 올라가 동장을 무함하자, 명종이 조서를 내려 동천의 병사를 감축하였다. 전부터 조정에 불만이 있던 동장은 당시 권력대신 안중회(安重誨)의 심복 무건유(武虔裕)를 잡아 가두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동장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아들 동광업(董光業)은 피살되었다. 마침내 동장이 장흥(長興) 3년(930)에 맹지상(孟知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뒤에 사이가 틀어져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휘하에게 살해당하였다. <資治通鑑綱目 卷277 後唐紀 明宗聖德和武欽孝皇帝>

동장[銅章]  동장(銅章)은 동(銅)으로 만든 관인(官印)으로, 군현(郡縣)을 맡은 지방관을 뜻한다. 동부(銅符)라고도 한다.

동장[銅章]  지방관(地方官)이 몸에 지니고 다니는 구리로 만든 관인(官印). 한(漢) 나라 때 2천 석(石) 이하의 관리가 몸에 차던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로, 보통 현령(縣令)을 뜻하는 말이다.

동장[銅掌]  동인(銅人)의 손바닥으로, 밤 이슬을 받기 위해 만들었다는 승로반(承露盤)을 말한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신선술에 미혹되어 감로(甘露)를 받아 마셔 수명을 연장시키고자, 건장궁(建章宮)에 신명대(神明臺)를 세우고 구리로 선인장(仙人掌) 모양을 만들어 세운 다음 동반(銅盤)을 받들고서 감로를 받게 하였다. <漢書 卷25上 郊祀志>

동장[東牆]  동쪽 담장.

동장[東墻]  송(宋) 나라 조사역(趙師睪)의 호(號)이다. 그 당시에 정권을 잡은 한탁주(韓侂冑)가 애첩(愛妾) 14명을 두었는데, 어떤 사람이 북주관(北珠冠) 4개를 선사하였다. 탁주는 4명의 애첩에게만 나누어 주었으므로 나머지 10명이 모두 욕심을 냈으나 주지를 못했다. 사행은 그 소문을 듣고 돈 10만 꾸러미를 들여 북주(北珠)를 사서 관(冠) 10개를 만들어 바치고, 자기의 첩을 시켜 벼슬을 구하도록 하여 공부 시랑(工部侍郞)에 승진되었다. <宋史 卷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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