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

동적[銅狄], 동적[洞赤], 동적전[東耤田], 동전[東箭], 동전[童箭], 동전[筒箭]


동적[銅狄]  구리로 주조하여 만든 인형으로 동인(銅人). 진시황(秦始皇)이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녹여 열두 명의 금인(金人)을 만들고 함양(咸陽)에 세우고 이를 동인(銅人) 또는 동적(銅狄)이라 불렀다 한다.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있다 하여 동적(銅狄)이라 부르며 또는 금적(金狄)이라고도 부른다.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황초(黃初) 원년에, 금적을 장안(長安)으로 옮겨가려 하였으나 너무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그대로 패성(霸城)의 남쪽에 두었다.[魏文帝黄初元年, 徙長安金狄, 重不可致, 因留霸城南.]”라고 하였고,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선인(仙人) 계자훈(薊子訓)이 장안의 동쪽 패성(覇城)에서 어떤 노인 한 사람과 적인(狄人) 형상의 동인(銅人)을 매만지며 “내가 이것을 만드는 것을 본 뒤로 벌써 오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適見鑄此, 而已近五百歲矣.]”라고 하면서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傳 薊子訓> <神仙傳 卷5> 참고로, 유영(劉迎)의 시 증인(贈人)에 “봉래산은 지척이라도 삼만 리나 되고, 동적은 사람과 달리 오백 년은 이어가리.[蓬萊咫尺三萬里, 銅狄因循五百年.]”라고 하였다.

동적[銅狄]  궁궐에 경점(更點)을 알리기 위하여 구리쇠로 만든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동적(銅狄)이라 한다.

동적[洞赤]  동작진(銅雀津). 조선 도성(都城) 남쪽 10리쯤에 있었다.

동적전[東耤田]  서울 동쪽에 있던 적전(籍田)으로 묘사(廟社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제향(祭享)에 쓸 곡식을 심던 논밭이다. 흥인문(興仁門) 밖 전농동(田農洞)에 있었으며, 해마다 권농일(勸農日)에 임금이 친히 밭을 가는 의식을 베풀던 친경전(親耕田)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적전(籍田)에 “적전은 동적전(東籍田)과 서적전(西籍田)이 있는데, 동적전은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밖의 전농동(典農洞)에 있고, 서적전은 개성(開城)에 있다.”라고 하였다. ‘耤’은 ‘籍’과 통용자이다. 임금이 몸소 밭을 갈아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설치한 전지(田地)를 적전(籍田)이라 한다.

동전[東銓]  동전(東銓)은 문관(文官)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吏曹)를 가리킨다. 동전(東銓)은 동반(東班)인 문신을 전형하는 이조(吏曹)를, 서전(西銓)은 서반(西班)인 무신을 전형하는 병조(兵曹)를 가리킨다.

동전[東田]  ‘밭이랑이 다 동쪽으로 났다[東田]’라는 것은, 외국에서 핍박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가 제(齊)나라를 핍박하면서 제나라의 밭이랑을 모두 동쪽 방향으로 내게 하였는데, 이는 후일에 진나라가 제나라를 칠 적에 진나라의 융거(戎車)가 진격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남무동전서주(南畝東田西疇).

동전[東箭]  동남죽전(東南竹箭)의 준말로, 중국의 동남방 회계(會稽)에서 나는 죽전(竹箭)이 가장 좋다고 한다. 전하여 재질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아(爾雅) 석지(釋地)의 “동남의 아름다운 것으로는 회계의 죽전이 있다.[東南之美者 有會稽之竹箭焉]”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동전[東殿]  세자. 중궁(中宮).

동전[童箭]  화살 이름. 일종의 짧은 화살. 또는 아기화살.

동전[筒箭]  대나무 통에 끼워서 쏘는 화살로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군중(軍中)에서 쓰는 전구(戰具) 중에 길이가 매우 짧은 편전(片箭)이란 화살을 대나무 통에 끼워서 쏘면 힘껏 당겨서 쏠 수 있는데, 튀어 나가는 힘이 먼 거리에 미치고 뚫고 들어가는 힘도 매우 억세 적들이 이 편전을 두려워하면서 “조선(朝鮮)의 애기 화살[童箭]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星湖僿說 卷5 萬物門 邊箭>

Leave a Reply

Copyright (c) 2015 by 하늘구경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