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죽[銅竹] 동인죽부(銅印竹符)의 줄임말로, 수령이 되어 황동과 대나무로 만든 인부를 참을 이른다.
동죽[銅竹] 동죽(銅竹)은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로,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에게 내려 주는 신표(信標)이다. 이들을 둘로 쪼갠 다음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었는데, 군사를 출동하는 일에는 동호부(銅虎符)를 쓰고, 그 나머지 일에는 죽사부를 썼다.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를 주었다.”라고 하였다.
동죽[桐竹] 부상(父喪)에는 상장(喪杖)을 오동나무로 만들어 짚고, 모상(母喪)에는 상장을 대로 만들어 짚었다.
동죽부[銅竹符] 동죽부(銅竹符)는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로,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에게 내려 주는 것이다. 한(漢)나라 때 지방관이 차던 신부(信符)로, 이를 둘로 나눈 다음 오른쪽은 경사(京師)에 두고 왼쪽은 군국(郡國)에 주어 군사를 출동하는 데에는 동호부(銅虎符)를 쓰고 그 나머지 일에는 죽사부를 써서 신표(信表)로 삼았다고 한다.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에 “처음에 군수(郡守)에게 동호부와 죽사부를 주었다.”라고 하였다.
동죽파[董竹坡] 동원순(董元醇)으로, 자는 자후(子厚)이고, 죽파는 그의 호이다. 함풍(咸豐) 2년(1852)에 진사에 올라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와 산동도 어사(山東道御史)를 역임하였고, 태복시 소경(太僕寺少卿)에까지 이르렀다.
동준예법[動遵禮法] 모든 행동거지에 예법(禮法)을 따름을 이른다.
동중[洞中] 장안(長安)의 신화원(神禾原)에 있는 연화동중(蓮花洞中). 즉, 정부마(鄭駙馬)가 사는 곳을 말한다. 이곳은 정씨(鄭氏)의 고거(故居)로 여름에는 동굴 안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동중서[董仲舒] 전한(前漢) 때 광천현(廣川縣) 출신의 학자로, 한나라의 순유(醇儒)이다. 일찍부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공부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武帝) 때 현량대책(賢良對策)을 올려 백가(百家)를 몰아내고 유술(儒術)만을 존중할 것을 주장했는데, 무제가 받아들여 이후 2천 년 동안 유학(儒學)이 정통 학술로 자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학문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천인감응(天人感應) 같은 신학적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서로 부응한다고 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 부부(夫婦)의 도도 모두 천의(天意)에서 나온다고 하면서 “하늘이 바뀌지 않으면 도도 바뀌지 않는다.[天不變, 道亦不變.]”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자신의 학설로 말미암아 투옥되는 등 파란 많은 생애를 살았다. 저술로 춘추번로(春秋繁露) 등이 있다.
동중서[董仲舒] 서한(西漢)의 금문경학가(今文經學家)이다. 호는 계암자(桂巖子). 신도(信都) 광천(廣川) 사람이다. 어려서 춘추(春秋)를 익혀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3년 동안 뜰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무제(武帝) 때, 현양대책(賢良對策)에 응하여 천인감응(天人感應), 대일통(大一統),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등을 주장하여 무제의 칭찬을 받았다. 이후 강도상(江都相), 교서상(膠西相) 등을 역임하였으며,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중시하였고, 특히 유학을 중심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받아들여 한대(漢代)의 통치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제(武帝)가 유학(儒學)을 국교(國敎)로 삼은 것도 동중서의 영향이 크다. 저술로는 춘추번로(春秋繁露), 동자문집(董子文集) 등이 있다. 유향(劉向)이 그를 일컬어 왕을 보좌할 재주가 있어 이윤이나 여상이라도 더할 것이 없고, 관중이나 안영의 무리도 미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명(明)나라 헌종(憲宗) 때 광천백(廣川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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