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董昌] 당(唐)나라 말기 무장(武將)으로 항주(杭州) 임안(臨安)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2년에 절서(浙西)의 비장(裨將) 왕영(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들을 모아 향병(鄕兵)을 일으켜 석감진(石鑑鎭)의 진장(鎭將)이 되어 왕영(王郢)을 토벌하였다. 이후 전류(錢鏐)와 함께 황소(黃巢)의 반란군에 대항하여 항주(杭州)를 점령하고 항주자사(杭州刺史)가 되었으며, 월주관찰사(越州觀察使) 유한굉(劉漢宏)을 토벌하여 월주(越州)를 병탄하고 항주자사(杭州刺史)의 직위를 전류(錢鏐)에게 넘겨주었다. 동창(董昌)은 이후 당(唐)나라 조정(朝廷)에 조공하여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해졌으나, 소종(昭宗) 건녕(乾寧) 2년(895) 자신을 월왕(越王)으로 봉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대월라평국(大越羅平國)이라 칭하고 칭제(稱帝)하였다. 그러나 전류(錢鏐)에게 토벌되고 자살하였다. <五代史 吳越世家>
동창[東昌] 우리나라 사신이 연경에 갈 때 경유하던 역(驛)의 하나인 동창보(東昌堡)로, 일명 동창포(東昌鋪)라고도 한다. 해주위(海州衛)의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그 주변에는 큰 벌판이 있다. 이전에는 우가장(牛家莊)이라 불리던 곳이다.
동창[東廠] 관서 이름이다. 일종의 비밀경찰로, 명나라 성조(成祖) 때 관원과 백성을 탄압하기 위하여 영락(永樂) 18년 경사(京師)의 동안문(東安門)에 설치했다. 환관을 주로 기용했으며, 우두머리는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가운데 임명했다. 백성의 비밀 결사 및 이단자를 감시하고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으므로 권력이 금의위(錦衣衛)보다 높았다.
동창[東廠] 중국 명(明)나라의 첩보 및 형옥(刑獄) 기관의 이름이다.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제위를 빼앗은 태종은 반대파의 저항이 두려워 환관을 첩자로 이용하다가 1420년(태종18)에 황제 직속의 첩보 기관으로 동창을 설치하였다. 장관인 제독동창(提督東廠)에 황제가 신임하는 환관을 임명하고 금의위(錦衣衛)까지 동창 아래에 소속시켰는데, 처음에는 관리의 부정이나 모반(謀反)의 정탐을 주로 담당하였으나 차차 민간의 범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구금(拘禁)과 처형의 권한을 갖게 되면서 그 폐해가 커졌다. 환관 중에는 이를 통하여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린 자가 많았다. 이들은 동창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다시 서창(西廠)을 증설하고 내행창(內行廠)이란 것을 새로 설치하여 이를 삼창(三廠)이라고 불렀다. 이들 기관은 환관 세력의 정치적 거점이 되어 명나라 정치에 큰 그늘을 드리웠다.
동창[東窓] 송(宋) 나라의 간신(奸臣) 진회(秦檜)의 별칭이다. 진회가 충신인 악비(岳飛)를 죽이려고 할 때 그의 처 왕씨(王氏)와 자기 집 동창(東窓) 아래에서 은밀히 모의하였는데, 나중에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맛보는 가운데, 자기 부인에게 “동창의 일이 발각되고 말았다[東窓事發矣]고 전해 달라.”고 도사에게 말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西湖游覽志餘 倖盤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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